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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오이카게] 오래된 책방 中

정오🌙 2018. 3. 27. 00:54



[오이카게] 오래된 책방 中


정오 글


읽기 전에, Rhodes의 Losing it이라는 노래를 듣고 와주세요. 읽는 데 지장이 없으시다면 함께 들어주셔도 좋습니다. 가사에 집중해주세요 :)


***


10.


네가 오는 길이 어둡진 않을까 널 위해 등불을 걸어 놓았다. 처음에 환했던 등불은 자고 일어나니 빛깔이 흐려졌고 또 자고 일어나니 불빛이 그보다도 미약해져 있었다. 어떻게 해도 점점 색이 바래지기만 했다. 내가 네게서 잊히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 세상은 네가 오기 전과 같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로지 흑과 백 뿐인 세상으로. 나는 책의 먼지를 털거나 너를 위한 길을 쓰는 일 이외에 시간이 날 때마다 거울로 머리와 눈 색을 확인해야만 했다. 여전히 검정이나 회색이었다. 밖은 비가 내리거나 종종 눈이 오거나 해가 쨍쨍했지만 마치 오래된 흑백 영화처럼, 현실 같지 않았다.

이곳은 내 현실이지만 네 현실은 아니니까.

네가 가고 난 뒤부터 쓰지 않은 메디코 델라 페스테 옆에 적힌 숫자가 늘어 간다. 아침마다 분필 조각을 들고 숫자를 하나씩 늘리는 일은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기에 씁쓸한 덩어리들을 삼켰다. 매일 잠을 자고 너를 그리워하며 일어났다. 매번 잠들기 전 내 하나뿐인 신에게 소원을 빈다. 부디 내 세상에 색이 칠해지기를.

놀랍게도 오늘의 하늘은 분홍에 가까운 붉은색이었다. 색이 칠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네가 걸어올 길을 하나하나 매만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괜찮았다. 너의 시간으로 2년하고도 열아흐레 만이었다.


11.


예전에 꿨던 꿈이다. 오래 전 일기장을 뒤져보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저는 지금 똑같은 곳에 와 있었다. 아이가 맨발로 길을 걸었다. 작은 의문이 든다. 한눈에 보기에도 뾰족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돌은 왜 제게 아무런 해를 미치지 못할까. 여전히 자욱한 안개가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그곳의 안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흩어진다. 달라졌다. 외길이었던 길 주위로 낮은 나무들이 심겨져 있었다. 그 나무는 그루마다 조그만 등이 걸려 있었는데 오래되어 반짝임을 잃어버린 것 같았으나 아이가 가까이 다가오면 환하게 빛을 발했다. 낮게 걸린 먼지투성이 등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손 가득 새카만 먼지가 묻었다가 나무에서 타오르는 재마냥 어느 순간 사라진다. 이상하다. 통 통 통. 걸어가는 아이의 뒤로 밝게 밝혀진 등이 주황빛을 덧댄다.


“……노노상?”
“기다리고 있었어.”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거리낌 없이 통통한 발을 들이밀었다. 전에 봤던 새 부리 가면은 어디로 갔는지 그의 눈 부분만을 고양이 가면이 가리고 있었다. 그 탓에 노노의 턱과 입술이 드러났다. 입술의 왼쪽이 위로 올라가고 오른쪽이 아래로 내려가 있다. 마치 반쪽은 웃고 반쪽은 우는 것 같았다. 턱끝이 파르르 떨렸다. 저번보다 확실히 아이의 시야가 높아졌다.


12.


내가 조금 더 자라 당신의 눈을 바라볼 수 있다면.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있다면. 당신의 거친 뺨을 쓰다듬을 수 있다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다면.

그러나 우리의 간극은 내가 아무리 달려도 좁혀지지 않았으므로.


13.


그는 여전히 검은 양복바지에 검은 조끼를 입고 있었다. 주머니에 꽃이 꽂혀있다는 것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꽃은 말라 비틀어져 당장이라도 바스라질 듯한 모양새였다.


“……오랜만이야. 한 번 안아봐도 될까?”


끄덕끄덕 움직이는 둥근 머리를 노노가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머리칼이 손에 가득 느껴졌다. 정신이 없다. 여전히 기적 같았다. 너의 실존이라는 것은. 노노가 이번엔 아주 살짝 그를 품에 안는다. 덩달아 노노의 등을 토닥이던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밀쳐냈다. 꽃이, 꽃이……!


“부서지면 어떡, 어?”


2년 전에 봤던 생기 흐르는 노란색 꽃이 거짓말처럼 노노의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혼란으로 가득찬 짙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던 노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을 맞췄다. 어어?! 놀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분명히 회색에 가까운 검은 눈동자였는데 지금은 어지러울 만큼 붉은 눈동자다. 신기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노노의 눈꺼풀을 쓰다듬고 속눈썹을 스치듯 지나갔다. 노노가 눈을 감았다. 작고 말캉거리는 손이 드러난 얼굴을 하나하나 매만지고 마음에 새길 때까지.


“노노상이 분명 그날 주머니에 있던 꽃을 주셨잖아요.”
“그래.”
“그런데 어떻게 다시 노노상에게로 돌아간 거예요?”
“돌아오지 않았어. 나는 또 다른 꽃을 꽂은 것 뿐이란다. 그건 네 거야.”
“역시 노노상이 키우는 꽃은 마법의 꽃인 거죠? 집에 있는 것도 다시 노랗게 됐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길 원하니? 다정한 목소리에 아이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노노가 싱긋 웃는다. 겨우내 잠들었던 꽃도 피어날 수 있을 듯한 따스한 웃음이었다.


“그럼 그렇게 될 거야.”
“노노상은 정말이지 마법사예요.”
“네가 그렇다면 나는 마법사야.”


언젠가 들었던 기억이 나는 말이었다. 아이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짜증이 실린 표정에 입술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자랐구나.”
“이제 곧 어린이가 아니게 될 거예요.”
“나는 마법을 부리지 않아. 마법을 쓰는 건 이 책방의 주인이 하는 일이지.”
“그런데 왜 마법사라고 그랬어요?”
“네가 나를 그렇게 명명했으니까.”


어려워요! 불만 섞인 목소리에 노노가 다시 싱긋 웃었다. 바지춤을 끌어올리고 아랫단을 접어야 했던 곰돌이 잠옷이 이제 댕강 짧아져 발목이 드러났다. 기대와 쓸쓸함이 반씩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카게야마.


“카레 좋아하지?”


카게야마가 금세 밝아졌다. 와르르 세상의 모든 종들이 쨍쨍 울려야 할 듯한 모습이었다. 기다려 달라는 말과 함께 노노가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성큼성큼 이동하는 발걸음이 빨랐다. 그 말을 무시하고 깡총깡총 아이가 달리듯 그의 곁을 따랐다. 나무 문을 여니 코끝으로 카레 냄새가 확 풍겨왔다. 동화에서나 보던 조그만 부엌이었다. 방글방글 제법 애다운 웃음을 흘리며 카게야마가 꺼내놨던 접시를 하나하나 노노에게 건넸다. 따끈하고 윤기가 흐르는 하얀 쌀밥 위로 개나리색을 띠는 카레가 부어졌다.


“직접 만드신 건가요?”
“응.”
“완전 맛있어 보여요!”


흥분한 목소리가 한 옥타브는 올라간 것 같았다. 카게야마가 아래가 깊은 수저를 들어올려 밥을 비볐다. 감자와 당근들이 크게 썰려 뭉근하게 끓여져 있었다. 수저를 옮김에 따라 채소가 으깨졌다.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였다. 볼이 미어지도록 카레를 밀어넣었다. 제법 많이 푼 밥이 어느 순간 싹 사라지고 없었다. 작은 혓바닥이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짭짭. 모자란 듯 입맛을 다시는 모습에 노노가 한 술도 뜨지 않은 제 그릇을 그에게로 밀었다. 쭈뼛쭈뼛 받아든 아이가 다시 신나게 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노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손에 턱을 괴고 있을 뿐이었다.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어느새 따라온 물을 카게야마에게 건넸다. 오늘 낮에 하늘이 사랑에 빠진 색이길래.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게야마가 마지막 한 술을 허겁지겁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떤 아이야?”
“음…… 예뻐요.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그래?”


14.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나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15.


“웃는 게 예뻐요.”
“너는 잘 웃질 않으니까. 엄마한테도 사랑한다는 말을 잘 하지 않지?”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모르는 게 없다니까.”


으쓱. 과장된 몸짓이었다. 첫 사랑에 빠진 카게야마의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노노가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루비를 한 숟갈 떠 박아넣은 듯한 눈동자 가득 카게야마가 어린다. 처음엔 주저하던 목소리가 조잘조잘 좋아한다던 아이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노노가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 하려던 말을 입 안으로 밀어넣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개수대에 넣고는 카게야마의 의자를 당겨 주었다. 폴짝 뛰어내린다.


“잠을 얼마나 자지?”
“열 시에서 일곱 시 까지요.”
“이제 별 일이 없다면 네 시간 남았구나.”
“아쉬워요.”


노노가 카게야마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손가락으로 벽면을 가리켰다. 저번처럼 창문이 생겼다. 도도도 창문으로 뛰어가는 카게야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밤하늘은 역시나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손으로 만지면 따뜻할 것처럼 환하다. 겨울 즈음의 바람이 카게야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딸랑딸랑, 어디선가 오래 전 들어본 듯한 풍경 소리가 들려온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얼굴의 조그만 솜털 하나하나로 바람이 느껴졌다. 싸한 향내가 난다. 이 책방에서만 맡을 수 있는 향이다. 오래된 사찰에 온 듯 마음이 가라앉았다. 포옥. 어느샌가 노노가 들고온 부드러운 담요가 몸을 덮었다. 카게야마의 눈이 반짝 뜨였다. 노노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익숙한 향이 진동했다. 공기가 징징 공명하는 것 같았다.
어지럽다.


“……네 눈 안엔 창밖보다 더 많은 별이 있어.”
“…….”
“창밖에 보이는 밤하늘의 색이 꼭 네 눈동자 색 같아.”
“감사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워. 네 눈이 밤하늘 빛깔이라서가 아니라 밤하늘이 네 눈의 빛깔을 하고 있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웅얼웅얼 카게야마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노노는 설명하지 않는다. 조금 더 일찍 헤어지겠네. 다만 쓸쓸한 목소리가 귓등을 울릴 뿐이었다. 카게야마가 노노의 팔을 붙잡았다. 노노가 잡히지 않는다. 울 것 같은 목소리가 “네가 잠에서 조금 일찍 깨어날 시간이야.” 하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게 흐려졌다. 반쯤 잠에서 깨어날 무렵 환청처럼 노노의 목소리가 어른거린다.

괜찮아.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으니까.


16.


“토비오?! 왜 울고 있어.”
“엄마…….”


나쁜 꿈 꿨니? 다정한 목소리로 카게야마의 어머니가 그를 달랜다. 아니야. 좋은 꿈 꿨어. 아이가 고개를 휘저었다. 그녀가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어깨 즈음에 고갤 묻던 카게야마는 급히 생각난 게 있는지 엄마의 품을 벗어나 허겁지겁 불을 켠다. 갑자기 들어온 밝은 빛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드르륵 맨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2년 전 조그만 병을 구해다 넣어둔 꽃이 있는 장소였다. 와앙. 카게야마가 여름날 처음 터지는 울음을 터뜨린다. 잘못 만지면 바스라질 것처럼 말라 가던 꽃은 방금 딴 것마냥 생생한 노란색을 뽐내고 있었다.


17.


시간은 흐른다. 곧 청소년이 될 거라고 소리를 뻥뻥 치던 카게야마의 나이도 청소년으로서 무르익어 간다. 오늘은 감기 기운에 조금 일찍 잠이 들었다. 이제는 어떤 날에 꿈 속에 들어갈 수 있는지 감이 온다. 때로는 너무 행복해서. 때로는 너무 슬퍼서, 때로는 너무 아파서. 그래서 묵묵히 제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때에.


“안녕?”
“오늘 하늘은 밝네요.”
“네가 일찍 잠들었을 뿐더러 오늘은 운좋게도 하얀 밤이 있는 날이라서.”


하얀 밤? 의문 섞인 목소리에 노노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잡아도 될까? 차분한 미성에 카게야마가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구태여 그를 보채지 않았다. 노노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자주 하지만 결론적으로 주된 이야기의 핀트에서 벗어나는 법은 없었다. 그가 가지는 의문에 대해서도 꼭 답을 해주는 편이었다.


“러시아어로 하얀 밤이라고 불린다더라고. 해가 안 지는 밤.”
“여기는 러시아가 아니잖아요.”
“극지에서도 해가 지지 않는 밤은 있어.”
“극지도 아니잖아요.”
“하하. 뭐 어때? 극지라고 생각하면 되지.”


오늘 그가 쓴 고양이 가면의 색깔은 검정이었다. 묘하게 들떠보이는 모습에 카게야마가 인상을 썼다. 찌푸려진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노노가 검은 구두를 벗어던진다.


“뭐 하세요?”
“너처럼 맨발로 걷고 싶어서.”
“진짜 이상해요. 러시아도 아니면서 러시아라고 하고, 극지도 아니면서 극지라고 하고. 여긴 어디예요?”
“잊었어? 여긴 아주 잘생긴 마법사가 있는 이상한 곳이라는 걸? 네가 생각하는 것이라면 모두 현실이 되는 곳이지. 그런데 그런 의문이 무슨 의미가 있겠니?”
“아주 잘생긴 마법사…… 책방 주인이 남자인가요?”


나잖아, 나! 노노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카게야마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책방 주위를 걷는 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걷는 모든 길에 등이 달려 있었다. 노노가 하나하나 손수 건 것이다. 하얀 밤이라고 해서 아주 쨍쨍한 낮같은 모습이 아니다. 하늘은 그저 푸른빛이 약간 도는 회백색이었다. 눈이 오기 전의 그것 같았다.


“얼굴이 안 보이는데 잘생겼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이전 가면 말이지. 네가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벗었어.”
“알아요.”
“메디코 델라 페스테는 죽음이라는 뜻을 가졌대. 의사들이 착용했다는데 페스트 환자를 치료하는 목적이었다지. 코 부분엔 꽃이나 과일처럼 향기로운 것들을 채워넣고.”
“…….”


어땠을까? 하늘을 바라보며 노노가 물었다.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지독히도 아파 보여서 카게야마는 차마 그에 답할 수 없었다. 땡그랑 땡그랑. 책방에 걸린 풍경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나라면 많이 슬펐을 것 같아. 노력했지만 결국 페스트 환자는 죽을 테니까.”
“…….”
“꽃내로 가득찬 가장 향기로운 죽음이겠지.”
“…….”
“아마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겠지만 또 다른 환자가, 또 환자가, 또다시 환자들이…….”
“그래도, 노력했으니까요.”


카게야마의 목소리는 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노노가 우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문득 그가 아주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일전에 카레를 해줬었나.”
“이후로 한 번도 해주지 않으셨죠.”
“할 줄 아는 게 카레밖에 없어. 네가 좋아한다길래 많이 연습했거든.”


음. 카게야마가 눈썹을 찡긋했다. 코를 긁적거렸다. 하아 한숨을 내뱉어 보았다. 매번 겨울 날씨인 이곳은 숨이 희게 피어오르기에 최적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이렇게 맹목적인 감정을 얻어본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애인이 생겼어요.”
“두 번째인가?”
“남자예요.”
“네 마음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겠구나.”


털썩. 카게야마가 길에 주저앉았다.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웅얼거리며 무어라 말을 하는 것도 같았다. 들리지 않아. 노노가 당황한 얼굴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게야마는 지쳐 있었다. 몸이 마구 흔들렸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다.


18.


아름다운 네 눈동자가 물에 잠길 때면 나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그냥 울어도 된다고 해주세요.

그렇지만 울지 못해 메말라가는 널 보는 건 더 아픈 일이잖아?

울어도 되나요?

마음껏. 다만 내가 그런 너를 달래줄 수 있으면 좋겠어.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19.


눈물이 왈칵 쏟겼다. 별들이 비에 잠긴다. 노노가 흐느끼는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언젠가 아홉 살의 아이가 그러했듯이.


“늘 제게 좋은 말만 하시네요. 당신은.”
“네가 낮에 달이 뜨고 밤에 해가 뜬다고 해도 그렇다고 하겠지.”
“대체…… 대체 당신은 누구예요?”


커다란 손이 카게야마의 귀를 막았다. 옅은 맥박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으로 이 순간이 영원하길 빌어 보았다. 아주 어릴 적 바닷가에서 소라고둥을 주워 귓가에 대어 본 적이 있다. 파도가 치는 소리가 났다. 노노의 손과 제 귀 사이에서도 그런 소리가 났다. 마음에 쌓인 먼지가 한 꺼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힘들었구나.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딱 제게만 들릴 정도로 노노가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잇새로 나온 음들이 아팠다. 꿀같은 다정함에 마음이 무너진다.


You’re not what you’re hearing
넌 네가 듣고 있는 그런 게 아냐

Cuz i’ve been watching you changing
왜냐하면 나는 네가 변하고 있는 걸 봐왔기 때문이야

and who said you’re one in a million
누가 널 백만 명 중에 한 명일 뿐이랬니

​​YOU’RE SO MUCH BETTER THAN THAT
넌 그보다 훨씬 소중해


20.


그전보다는 짧은 간격으로 노노를 만났다. 어떤 날은 이틀 연속으로 꿈을 꾸기도 했고 어떤 날은 몇 개월 만에 그를 만나기도 했다. 그 사이에서 카게야마는 세 번째 애인을 사귀었고 고등학교로 진학했으며 그 애인과 헤어졌다. 노노는 이런저런 이야기에 그저 귀를 기울이기만 했다. 아홉 살 때 노노를 만났으니까, 이제는 8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카게야마는 그동안 성격이 조금 더 무뚝뚝해졌고 키도 훌쩍 자랐다. 생각도 아이의 것과는 많이 달라졌으며 행동도 무거워졌다. 노노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든지.”
“당신은 뭐죠? 왜 저는 매일 자라고 있는데 당신은 그대로인가요?”


카게야마가 노노에게 물음을 던진다. 오늘은 창밖으로 소복소복 눈이 내리고 있었다. 뒤돌아 책의 먼지를 털던 노노가 카게야마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붉은 눈동자였다. 카게야마는 왠지 머리가 울렁거림을 느꼈다. 늘 문에 달려 있는 풍경의 딸랑거림과 매번 이 책방을 채우는 향내에다 단편적인 장면들이 추가돼 그를 어지럽힌다. 체육관에 배구화가 마찰되는 소리, 땀냄새, 손길, 공이 튀는 소리, 휘슬 소리 같은 것들이.


“아직은 안 돼. 들어가.”


가까이 다가온 노노가 카게야마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주문을 걸듯 중얼거린다. 마치 그가 어떤 것을 경험하고 있는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말이 끝나자 어지러운 머리가 한결 산뜻해졌다. 카게야마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혼란스럽다.


“나는 성인이니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아무리 성인이라도 뭔가 나이가 든다는 느낌은 있잖아요. 근데 노노상은 그저 한결같아서…….”
“그럼 나는 혹시 팅커벨이 아닐까?”
“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카게야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노노의 말에서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고 다시금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노노가 환히 열렸던 창문을 약간 닫았다. 주황색 등불의 빛이 창문에 가려져 내부가 약간 어두워진다. 어둠이 딱 노노의 얼굴 부분을 가리고 있었기에 카게야마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알 길이 없었다.


“네가 어린 시절에만 존재하는 그런 팅커벨 말이야.”


어디쯤 있더라. 노노의 단정한 손가락이 가까이 있는 서가를 뒤적거렸다. 빠르게 책 제목을 눈으로 훑더니만 아주 낡은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사각사각.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네가 어른이 된다면 난 잊혀서 사라져버리지만, 그래도 여기서 너를 기다릴게. 나중에라도 꿈과 현실의 세계를 믿는다면 난 거기에서 너를 사랑하고 있을 거야.’ ……어때? 카게야마.”
“……저는, 저는 도무지 노노상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여긴 너무 어렵고 어지러워요. 제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같아요.”


툭. 카게야마의 고개가 땅으로 떨어지고 그의 손이 마른세수를 한다. 노노가 책을 아무렇게나 꽂았다. 조급한 발걸음이 그에게로 향했다. 팔을 길게 뻗어 둥근 머리와 굽은 등을 끌어안는다. 예전보다 훨씬 자랐지만 높은 체온은 그대로다. 여전히 아이같음을 가진, 어른으로 걸어가는 너. 입술 언저리를 정수리에 몇 번 눌러 보았다. 카게야마의 숨소리가 몸을 타고 느껴졌다. 카게야마에게 보이지 않는 노노의 눈은 꼭 울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어려워 하지 마.”
“저도 그러고 싶어요.”
“나는 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힘들지 않아요.”
“네가 그렇다면, 그래.”


한참을 억눌렸던 목소리가 억지로 쥐어짜내진다. 노노가 어린애를 다루듯 카게야마의 등을 토닥거렸다. 내리던 함박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한다.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이 조그만 책방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쏴아아, 쏴아아. 결국 비가 되어 내린다. 빗소리에 제 목소리를 한 발짝 숨긴 채 카게야마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누구나 이름이 있잖아요.”
“그렇지.”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이제 저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요.”


노노가 뜸을 들인다. 어떤 대답을 내어줄 지 고민한다. 카게야마가 고개를 들어 노노를 직시했다. 그의 새빨간 눈동자에 잠시 다른 색이 보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이름은 노노야.”
“틀렸어요! 아직도 저를 애 취급 하시나요?!”


외치는 목소리에 공기가 갈라졌다. 노노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한숨을 쉬었다. 한숨은 꽃처럼 피어나 카게야마의 마음 한 구석 미안함을 잔뜩 퍼뜨린다. 죄송해요. 풀죽은 음이 노노에게로 가닿았다. 그러나 노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지만 입술은 다시 파르르 다물린다.


“이제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
“그 생각을 수십 번 했어.”


내 이름, 오이카와라고 해. 그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유모를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웃었다. 물 먹은 솜처럼 가슴이 무거웠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

노노가 불렀던 노래는 EDEN의 Wake up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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