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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밤의 강에는 그림자가 지지 않는다 2
정오 글
***
하루의 일과는 주사를 맞는 것부터 시작한다. 주삿바늘이 빠져나가고 핏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팔뚝을 솜으로 꾹 누르고 있으면 눈앞이 핑그르르 돌다가 온몸에 열이 난다. 불타오르는 열기에 혀를 빼물고 헥헥거렸다. 몸이 익는 것 같았다. 용암이 몸 안에 길을 내는 기분이다. 뜨거운 것들이 일렁이는 자리마다 터질 듯한 힘이 자리 잡는다. 눈 앞에 유리로 된 물컵이 있었다. 몸이 묽은 반죽처럼 축축 늘어졌다. 눈은 깜빡이는 눈꺼풀의 열기에 덴 듯 따가웠다. 미적지근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물에 입술을 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어제는 물컵을 깨뜨려 버렸다. 일주일째 같은 반응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사이에 유리는 깨어지고 만다. 유리컵에 적당한 힘을 내보냈어야 하지만 몸 안에 가득 찬 힘은 저리던 다리의 피처럼 약간의 탈출구를 보이자마자 터질 듯 쏟아졌다. 매일이 흐를수록 열기의 양이 강해진다. 혀는 곧 세포의 결대로 조각조각 갈라질 것만 같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힘의 컨트롤이 어려웠다. 그는 1만큼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데 열기는 1, 2, 4, 7… 끝을 모르고 올라가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오른손과 왼손을 맞잡았다. 아직 힘겹지만 잘만 하면 성공할지도 몰랐다. 살고 싶다. 목이 타들어간다.
저 물을 마시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살고 싶어. 살고 싶어. 나는 살아야 해. 죽을 것 같아. 그리고 살고 싶어. 살고, 살고…….
해 본 적은 없지만 경험을 탓하며 가능성을 포기하기엔 삶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컸다. 기실 몸에 열이 오른다고 해서 죽기야 하겠나 싶었지만 오이카와는 여러 번의 경험으로 이 열기의 끝을 알고 있었다. 경험하기 싫다. 버석한 입술을 악물고 오른손으로 힘을 쏟아냈다. 아주 약간의, 꼭 잠근 수도꼭지에 달랑 자리 잡은 물 한 방울 같은.
- 윽……!
몇 년을 보고 살아온 제 몸에 쏘아내는 것이라 어느 정도의 힘을 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눌러 참은 힘은 왼손 손바닥을 난도질하듯 긁어놓는다. 순간 하얗게 질렸던 피부는 그 방향대로 뜯겨나가며 새빨간 피를 내었다. 이를 악물고 왼편의 벽에 손바닥을 꾹 눌렀다. 어제만큼의 힘을 두 개로 나누어 양손으로 보냈다. 피와 직접적으로 닿은 벽에 실금이 생김과 동시에 물컵이 두둥실 떠오른다. 오이카와의 눈앞까지 도착했을 땐 반절이 쏟긴 상태였지만 그 정도면 타는 갈증을 잠재우는 데 적어도 일말의 도움은 되리라. 그가 물컵에 얼굴을 박고 혀로 물을 마셨다. 겨우 딸려 올라온 물방울이 목구멍을 적시자마자 몸에 힘이 빠지며 축 늘어져 기절한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 괜찮니? 영양제와 네 몸이 안 맞는 모양이야.
- 아…….
- 내일부터는 주사 없이 그 시간에 다른 거 하자.
눈을 뜨자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의 연구원이 말를 건넨다. 훈련을 하기 싫어요.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똑똑했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또각또각 걸어나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왼손을 눈앞까지 들어 올렸다. 하얀 형광등의 빛에 눈이 아프다. 만족스럽게도, 상처투성이인 손으로도 빛을 가릴 수 있었다.
- 여기서 멋지게 능력을 갈고닦으면 히어로가 될 수 있어요. 슈퍼맨 같은 히어로 말이죠. 성장한 여러분들은 여기저기 파견을 나갈 거고, 위험에서 이 나라를 구해낼 거예요.
그쯤 해서 꿈이 생겼다. 히어로가 되어야겠다고 맘먹었다. TV에 나가고, 인터뷰를 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히어로. 피가 철철 났던 왼손바닥에 아주 희미한 상처의 흔적만이 남았을 때였다.
- 히어로? 당연히 될 수 있지. 네 능력이라면……
그는 언제고 제 자리에서 최고를 놓쳐 본 적이 없었다. 원래도 가득했던 능력에 열정이 부어지자 그의 실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방에 깔린 이불이나 옷가지는 오이카와의 훌륭한 연습 도구였다. 그런 그가 한 발짝 더 꿈에 가까워진 때는 옷가지를 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그것을 자유자재로 접을 수 있게 된 때였다.
- 이와쨩. 너는 무슨 포지션이 되고 싶어?
- A. 멋지잖아.
일주일에 몇 번 없는 이론 수업을 들으며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다. 개인의 능력은 복잡하고도 조금씩 다 다르고, 특출 난 분야가 따로 있다는 게 그것이었다. 그로써 나누어지는 포지션은 네 개. 우선 100퍼센트 공격형이며 팀 공격의 주축이 되는 포지션 The central axis. Central의 앞글자를 따서 C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대개 A라고 표현하며 주로 아주 화려하고 폭발적인 능력들을 쓴다. 그들은 내공이 쌓이고 실력이 늘면 무기까지 구현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 맛층은?
- 하나마키가 A 하니까 나는 M.
두 번째 포지션, Multi player. 이쪽은 공수가 유연한 이들이 주로 맡는 포지션이었다. 공격에 능숙해야 하고 방어에도 소질이 있어야 한다. 주로 A에게 노출되는 공격까지 막아내야 하기에 결계를 치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막아내기만 해서는 빠른 진전이 없으므로 보통은 막아낸 공격을 가지고 그대로 역공격까지 넣는 편이다. 하는 일이 많기에 체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한 건 당연했고.
그러나, 아무리 결계를 치고 공격을 막는다 한들 막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잃어버리는 순간 바로 자기 능력에 잡아먹히는 꼴이 되는, 정신력이다. 정신을 파고드는 공격은 섬세하고도 위험하기에 쉽게 막아낼 수가 없다. 그것은 아주 조금의 빈틈만 보여도 금세 한 사람을 파멸로 이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개인이 가진 것 이상의 능력을 사용하면 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정신이 서서히 붕괴되는 경우도 있었다. 정신 붕괴는 팀의 흥망을 결정짓고 그렇게 된 그 개인도 결국 철저하게 망가지고 만다. 따라서 세 번째, 특수 포지션이 생겨나게 된다. A guardian(또는 A guardian deity). 줄여서 G라고 부르는 그 포지션은 팀의 어떠한 공격에도 가담하지 않고 오로지 마지막 한 겹의 정신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앞서 말했듯 공격에 가담하지 않으므로 주로 숨어 있거나 팀원들에게 보호를 받는 편이다.
- 넌.
- 난 당연히 E!
마지막 포지션의 정식 명칭은 The eyes. 앞 철자만 따 E라고 불린다. 이들은 사실상 팀의 리더이자 조타수다. 그들은 각 포지션들이 과하게 상대에게 몰입해 다른 부분을 놓치는 맹점이 생기지 않도록 길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자신의 정신을 팀 구성원들의 수만큼 나누고 그들과 연결 지어 상황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를 하는 동시에 자세한 명령을 만들고 원하는 이의 의식으로 보내야 한다. 따라서 한 팀을 구성하는 수가 6명 안팎인 데는 E포지션의 이유가 컸다. 정신은 여러 갈래로 나뉘면 나뉠수록 더 큰 집중력과 능력이 소요된다. 채널 화면을 하나만 볼 때와 다섯 개를 동시에 볼 때의 정확도와 정밀성은 다를 수밖에 없기에. ‘본다’. 흔히들 그들의 소통 경로를 그렇게 표현했다.
- 우리 담당 선생님은 네가 A가 될 것처럼 얘기하시던데.
- 난 E야. 그것도 아주 멋진 공격형!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이와이즈미를 바라보며 오른손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오이카와는 상급반에 진급했다. 모르고 살았던 그의 나이는 열한 살, 상급반으로 진급한 E들 중 최연소였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가슴을 당당히 편다. 히어로가 되겠다는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했다.
- 어제 나카무라상이 처음으로 나갔다던데.
- 돌아왔대?
- 응. 그런데 몸을 좀 다쳤다나 봐. 치료 중 이래.
나도 가고 싶어……! 흥분에 몸을 바르르 떨며 오이카와가 왼손을 공기 중에 들어 올렸다. 미간을 좁혀가며 힘을 쓰자 푸른 물체가 빠르게 생겨나다가 아주 잠깐 타이밍을 놓친 사이 허물어진다. 으악 소리를 치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어두운 홍차색 눈동자가 별이 박힌 듯 빛난다. 누우면 바라보게 되는 드높은 천장은 언제가 되면 끝이 없는 하늘로 바뀔 수 있을까.
- 새로운 애가 들어왔다는데.
- 한둘인가 뭐.
- 천재래. 아마 E가 될 모양이야. 부모님이 여기로 데려왔다고 하더라.
- 좋네~. 부모도 있고.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나 실상은 가족에 대한 결여와 지독한 그리움, 그리고 일말의 부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말투였다. 그걸 잘 알기에 그도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가족이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해 아래 서는 기분과 비슷할 거야 분명.
오이카와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마츠카와와 이와이즈미가 털썩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다. 그러던 도중 어느샌가 곁에 온 하나마키가 허리를 숙여 오이카와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봤다. 볼까지 패어내며 활짝 웃는다.
- 가족 여기 있네. 어때? 해 아래 서는 느낌이야?
- 맛키!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겐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고된 훈련과 주어지지 않는 자유는 그를 지치게 하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걸어나갈 수 있는 건 분명 그들의 덕택이었다. 하나마키의 가늘고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여름같이 쾌청한 미소가 얼굴마다 가득하다.
괜찮다, 그는 정말 괜찮았다.
- 안녕하세요. 저는 카게야마 토비오라고 합니다.
- 응. 나는 오이카와 토오루.
보자마자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얘기했던 천재라는 아이임에 틀림없었다. 카게야마의 첫인상은, 너무 큰 상급반 체육복에 세 번 넘게 접은 소매와 바짓단이었다. 곧이어 눈에 들어왔던 건 짙은 색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 그건 가끔 자다 깬 밤의 그것 같은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통은 또 그가 훈련할 때마다 사용하는 하얀 공처럼 동글동글하다. 그런 조그만 아이가 그의 기록을 열 살로 앞당겨 깬 당사자라는 게 믿기질 않았다.
카게야마는 어려서 말이 많을 법도 한데, 유난히 과묵했고 인간관계에도 유난히 서툴렀다. 상급반 내에서는 그런 그를 귀여워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천재는 역시 다른 부분에서 부족하다니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이카와는 글쎄, 남들이 보기에는 후자에 속했으나 그가 정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전히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자신을 능숙하게 숨긴 채로 그에 맞는 가면을 쓰고 다닐 줄 아는 이였기 때문에.
어쨌든 오이카와는 티가 나게 카게야마를 싫어했다. 모두가 아는데 정작 당사자인 카게야마만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능력을 쓰는 법을 알려달라는 것.
- 너도 능력 쓸 수 있잖아!
- 그치만 더 완벽하게 쓰고 싶단 말이에요.
- 봐봐, 토비오쨩. 여긴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널렸는데 왜 나한테만 자꾸 그래?
카게야마는 떽떽 말을 되받아치다가도 방금과 같은 질문이 들어오면 입을 암, 다물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불퉁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가 다음날이 되면 또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 늘 들었던 의문이 증폭된 것은 카게야마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하고 난 다음부터였다. 그 날은 두 달에 한 번 있는 실전 연습 시간이었다. 각 포지션들마다 랜덤으로 멤버를 뽑아 팀을 구성하고, 토너먼트 식으로 연습 경기를 펼친다. 한 팀에 들어가는 수는 보통 여섯 명. E 한 명과 A와 M 각각 두 명 정도에 필요에 따라서는(처음 호흡을 맞추는 팀이기에 능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은 이상 G는 잘 참여하지 않는다.) G까지. 넓지 않은 연습실 안에서는 한 쌍의 팀이 경기를 펼치고 나머지 팀들은 유리벽 바깥에서 그것을 구경하고 분석한다. 그러다 마지막 여덟 팀이 남게 되면 옥상으로 이동해 마저 경기를 진행하게 된다. 이유는 경기가 지속될수록 쓰는 능력의 범위가 점점 커지기 때문에 혹시나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
- 야 쟤…….
- 진짜 천재인가 봐.
카게야마는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눈을 부릅뜨고 연습실을 둘러보더니만 정식 경기 시작 이후부턴 쭉 눈을 감고만 있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술렁거린다. 다른 팀들의 연습 경기에 별 관심이 없던 오이카와도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게야마 쪽을.
- 네 제자 맞는데? 너랑 보는 방식이 비슷하잖아.
- 제자는 무슨, 얼어 죽을.
한 번만에 공간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같은 팀이 된 이들의 시선으로도 무리 없이 상황을 파악한다. 카게야마는 아직 작았고, 그의 팀원들은 컸다. 시선의 높이가 심하게 어긋나면 길을 잡는 데 제약이 있을 텐데 카게야마의 명령은 고민 없이 쑥쑥 흘러나오기만 한다. 감긴 눈은 아주 잠깐이라도 눈동자를 내보일 생각을 않았다. 오이카와와 똑같은 플레이 방식이었다. 눈을 뜨지 않으면 집중력과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대신 공간 파악이 힘들기에 크고 위험한 싸움이 아니라면 굳이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이카와의 목표는 이곳이 아닌 더 높은 곳. 그는 모든 곳에서 안정적인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 쟤 너 본다.
- …….
동그란 머리통이 휙휙 돌더니만 오이카와를 찾아내고 빤히 쳐다본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오이카와는 오른손을 설레설레 저었다. 다른 곳을 보라는 의미였으나 카게야마는 계속해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이상한 표정을 만들어낸다. 거슬린다. 오이카와가 휙 고개를 돌리고 마츠카와와 말을 섞었다. 경기는 물론 카게야마가 속한 팀의 승리였다.
불이 꺼진 강당 안, 추운 온도에도 옷을 흠뻑 적실 정도로 땀을 흘려대는 오이카와가 있었다. 벌써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도 몰랐다. 밝았던 창밖이 어두워지고, 강당의 불이 꺼진 것도 체감상 꽤 오래전이었기에 아마도 날짜를 넘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뿐. 고된 연습에 그는 지쳐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무기를 형상화하고 싶어서 계속해서 연습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제 포지션에서 쓰이지도 않을뿐더러 차라리 실재하는 무기에 힘을 실으라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들어오지만 꿋꿋이 연습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수 있다면 뭐든지 갈고닦아야 한다는 생각과, 형상화는 그 자체로도 상대의 기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정규 수업시간에 다뤄지지도 않는 높은 기술을 홀로 만들어내려니 아무리 오이카와라도 지치게 된다. 중얼중얼 저를 다독거리며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찬 기운이 땀이 난 등 가득히 싸하게 올라온다. 뼈까지 시린 느낌에 인상을 쓰고는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눈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멍하다. 차가워진 머리는 그로 하여금 좀 더 이성으로 가득 찬 것만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거짓 같은 집중력이었다. 시야가 슬로 모션처럼 느릿하게 펼쳐진다. 몸에 있는 모든 힘들은 한 방향으로 움직였고 마치 그것을 모두 통제할 만한 능력이 생긴 것 같았다. 천천히, 그의 왼손을 타고 푸른빛을 내는 조그만 칼 하나가 만들어진다. 숨도 쉬지 않은 채 몸의 모든 감각을 그곳에 집중한다. 날의 끝이 완벽한 선을 이룬다. 쨍그랑. 하나의 물체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숨을 골랐다. 그제야 인기척이 느껴진다.
- 또 너야?!
- ……가르쳐 주세요.
- 아니 그러니까 토비오쨩. 여긴 오이카와씨보다 잘 하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니까요?
너스레를 떨지만 밤색 눈은 움직이지 않고 굳건히 오이카와의 칼에 집중돼 있다. 그가 일어났다. 조그마한 칼은 금세 분해되어 다시 오이카와의 몸속으로 되돌아간다. 안 잘 거야? 피곤한 목소리로 물어도 대답이 없다.
- 토비오쨩?
- 저 바보 아닌데요.
- 바보라고 말 안 했는데?
- 가르쳐 주세요.
- 원 참. 여기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 없어요! 그러니까 가르쳐 주세요. 오이카와상.
빽 소리를 쳤다. 의도치는 않았으나 그에게서 드디어 대답을 얻어 냈다. 오이카와가 짙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인정받은 듯한 느낌이 묘하다. 지치고 졸음에 겨운 홍차색 눈동자와 또랑또랑하고 힘에 넘치는 밤하늘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조그만 아이의 말에는 확신이 넘치고 있었다.
***
‘“”’ 는 현재, ‘-’는 과거의 대사를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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