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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오래된 책방 上
정오 글
읽기 전에, Rhodes의 Run이라는 노래를 듣고 와주세요. 읽는 데 지장이 없으시다면 함께 들어주셔도 좋습니다. 가사에 집중해주세요 :)
https://youtu.be/eP6TiA1rVIQ
***
0.
작열하는 태양 아래 우리는 달리고 있었다.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은 고작 평행선밖에 되지 못했다. 뿌연 모래가 시야를 가리고 건조한 공기가 목 안을 메마르게 만들었다. 이윽고 멈춰선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세상의 끝이었다. 너무도 지쳐버린 너는 또 다른 세상의 끝을 찾지 않고 그만 그 아래로 몸을 내던져버렸다. 나는 그제야 너와의 평행을 깰 수 있었다. 떨어지는 너의 발끝을 잡기 위해 처음으로 네 등을 바라봤다. 온갖 생채기가 난 맨등에서 가장 깊게 네 심장까지 파고들어 옭아맸던 상처는 나였다. 세상의 끝이 끝이 나질 않는다. 바람에 쓸려 입 안으로 들이닥치는 모래를 씹으며 널 사랑했구나 헐떡였다.
너는 어디에 있지?
1.
번쩍 눈을 떴다. 분명 몇 분쯤 전에 잠에 들었던 것 같은데 깨보니 침대는 온데간데 없고 온통 자욱한 안개만이 가득했다. 차오르는 두려움에 갈색 곰이 그려진 잠옷바지를 꽉 움켜쥐었다. 눈앞에 분명 아까는 없었던 길이 생겨 있었다. 숨소리조차 삼키고 길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오른손으로 안개를 저었다. 스르르 흩어지나 싶더니만 이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살금살금 작은 길을 따라 걸었다. 모나고 울퉁불퉁한 돌들로 가득한 길을 작은 맨발이 움직인다. 잘못 스치기만 해도 피가 날 것 같은 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맨발에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어…….”
방금 전까진 못 봤는데. 의아한 생각을 심어 준 건 아주 오래된 듯한 가게 하나였다. 손으로 건들면 부서질 것만 같다. 나무로 만들어진 외벽은 옆면에도 먼지가 소복이 쌓여 푹신해 보일 지경이었으며 가게 전체는 마치 흑백 처리를 해논 것처럼 색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하나 덜렁 달린 문은 닫힌 지 몇십 년은 족히 된 것 같았다. 그 문을 중심으로 있는 벽엔 아주 낡은 포스터라거나 역시나 색이 없는 작은 인형들이 걸려 있었다. 모든 것에 시간이 겹겹이 쌓였다. 문에 매달린 조그만 풍경을 빼고는.
“이상해.”
유리로 된 풍경은 먼지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공기를 부유하는 작은 조각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 듯 맨질맨질했다. 이곳은 이상하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흑백과 먼지로 칠해진 곳인데 풍경이 어떻게. 그러나 더 놀라운 건 풍경의 안에 매달린 꽃 한 송이였다. 기껏 해봐야 엄지 손가락 반만한 크기의 노란 꽃이 제 색을 드러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어린 티가 여실히 나는 손가락이 풍경을 손끝으로 살짝 민다. 매달린 거라곤 노란 꽃밖에 없는데 쨍그랑 맑은 소리가 났다.
“어어?!”
수채화가 칠해지듯 순식간에 그곳이 색으로 뒤덮였다.
2.
색이 살아난 그곳은 겨울 즈음의 분위기였다. 겨울밤,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의 인적이 드문 작은 골목 같은. 그제야 문 위에 매달린 나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앞에 적힌 글자들은 마모가 심해 알아볼 수 없었지만 뒤에 적힌 책방이라는 단어는 알아볼 수 있었다. 책방같은 느낌은 아니었는데 생각하다가도 묘하게 수긍케 되는 외관에 고갤 끄덕여 본다. 이곳이 만약 겨울이라면 그것치곤 따스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풍경을 울린다. 풍경에 매달린 종이가 뒤집혔다.
「들어와.」
아까는 분명 이런 종이가 없었는데.
3.
이곳은 이상한 세계니까.
4.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었다. 호기심에 가득찬 눈동자는 딱 겨울의 밤빛이었다. 키보다 조금 높은 손잡이를 잡아 내렸다. 오래된 문은 끼긱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갈 길을 터 주었다.
“계세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들어갈 때는 꼭 이 말을 해야 한다고 부모님께 교육을 받았다. 어른이라도 된 듯 뿌듯해져 어깨를 으쓱했다. 책방 안은 향내와 꽃내, 먼지나 퀘퀘한 내 따위가 뒤섞여 묘한 향취를 풍기고 있었다. 어라? 코끝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밖엔 비가 오지 않는데.
손가락으로 물방울을 훔쳤다. 고개를 숙이고 반짝이는 물기를 관찰하는데 또다시 머리로 물방울 몇 개가 떨어진다. 뭐지? 아직 증발하기 전인 물방울에 혀를 댄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궁금해서 입에 넣었던 하얀 소금만큼이나 짜다. 꾹꾹 참다 참다 흘러나온 눈물맛이었다.
“아무도 안 계세요?”
고개를 휘휘 저어보자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게니까 주인이 있겠지? 생각하며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곧 잠옷인 걸 깨닫고는 울상이 된다.
“안녕?”
“안……녕하세요.”
기척도 없이 가까이 다가온 이는 훤칠한 키를 가지고 있었다. 복숭아뼈가 드러나게 까만 양복바지를 입고 까만 구두를 신었다. 검은 셔츠 위엔 역시나 검은 조끼를 입었는데 단단해 보이는 몸에 단정히 달라붙어 있었다. 또 말투도 다정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을 한 번 더듬어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얼굴을 가린 가면에 있었다. 하얀 가면은 얼굴선을 따라 붉은 실이 바느질 되어 있었으며 그 안쪽은 보랏빛과 붉은빛 꽃들이 여기저기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마치 새의 부리처럼 앞부분이 크게 휘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말을 더듬은 이유가 되었다.
“……메디코 델라 페스테라고 불러.”
“어려워요.”
“그냥 새 가면이야, 카게야마.”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
남자의 목소리는 반쯤 활기찼고 반쯤 먹먹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저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는데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카게야마가 바지를 추켜올렸다. 풍경 안에 있던 노란 꽃이 남자의 가슴팍에도 똑같이 꽂혀 있었다.
“아저씨가 이 책방의 주인인가요?”
“아니. 나는 그저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일 뿐 주인은 아니란다.”
“그럼 아저씨는 마법사인가요?”
카게야마. 너는 지금 몇 살이지? 묻는 말에는 대답치 않고 뜬금없이 나이를 묻기에 ‘초등학교 이학년, 아홉 살입니다.’ 하고 답했다. 말을 하면서도 눈동자는 이 오묘한 책방을 둘러보기에 바쁘다.
“나는 아저씨가 아냐. 그 말 말고 ‘상’을 붙여 주면 좋겠는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네가 지어줄래?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름을 가지지 못했거든.”
“저어, 노노라고 부를래요. 괜찮으세요?”
왜냐하면 노란색 꽃을 달고 있으니까요.
그래. 뭐든.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분명 가면의 부리 아래로 미소가 떠올랐을 거라고 카게야마가 확신했다.
“주변에 가게가 하나도 없던데 뭘 드시고 사세요?”
“……지금 너는 뭘 좋아하지?”
“카레요! 혹시 노노상도 카레를 좋아하시나요? 전 카레라면 세 그릇도 먹을 수 있어요! 도시락으로 카레를 싸가면 항상 별 스티커를 두 개씩 받아요.”
좋아하는 주제가 나오자 흥분한 건지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는 지금 스티커를 마흔 세 개 모았어요! 오십 개가 되면 선물을 받을 수 있어요. 멋있죠? 새가 짹짹이듯 높은 목소리가 종을 울린다. 노노가 허리를 숙여 카게야마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카게야마는 그제야 노노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노노는 회색에 가까운 검은 눈동자와, 같은 색의 머리를 가졌다. 눈이 마주친 채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노노의 흰자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노노는 카게야마와 눈을 맞춘 이래로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아 맞다. 그래서 노노상은 무얼 먹고 사나요?”
“……꿈을 먹고 살지.”
“꿈이요?”
그래, 꿈. 아주 오랜 기억이라든가 하는 것들. 미성의 목소리에 음울함이 담겼다. 시선은 카게야마를 스쳐 지나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 했다. 눈은 여전히 감기지 않아 곧 피가 흐를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카게야마의 조그만 손이 가면의 부리 부분을 쓰다듬었다.
“노노상. 눈 감아요. 눈이 아파하잖아요.”
5.
네가 사라져버릴까 두려워.
6.
“눈 깜빡이는 건 아주 작은 시간인데 제가 어떻게 사라져요?”
그리고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귀를 댕그랑 댕그랑 울리는 걸 느끼며 노노가 빠르게 서너번 눈을 깜빡였다. 따갑다. 익숙하다못해 당연해진 감각이다.
“뭐든 물어봐.”
“꿈은 먼 일인데 어떻게 그걸 미리 먹을 수 있어요?”
기억이 곧 내 꿈이야.
카게야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꿈은 먹는 게 아닌데. 물어보긴 싫은지 한참을 말의 뜻을 고민하는 아이를 노노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하얀 가면에 가려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어려워요. 카게야마가 고심 끝에 결론을 내놓았다. 알기 쉽게 가르쳐주면 안 돼요?
“아직은 안 돼.”
“그럼 언제쯤 가르쳐 줄 수 있나요?”
“네가 조금 더 자라고 나면.”
좋아요. 매일 아침마다 우유를 마시고 있으니까 금방 자랄 거예요. 노노의 말과는 약간 어긋난 추측을 내놓았다. 노노는 대답 없이 손끝으로 벽을 가리킨 채 몇 번 힘을 주었다. 그러자 각종 포스터와 낡은 책들로 가득했던 벽에 커다란 창문 하나가 생겨났다. 아깐 분명 밤이었는데 이젠 새벽별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후와아. 기다란 감탄과 함께 카게야마가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색이 없었던 하늘 가득 어슴푸레한 빛깔이 맴돈다. 밤에 박힌 별들보다 더 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오른손을 길게 뻗는데 이번엔 팔 위로 툭 물이 떨어졌다. 차갑지도 않았다. 노노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면 노노는 카게야마에게 등지고 책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후두둑 후두둑. 비처럼 물이 내린다. 살며시 가져다 댄 혀에서는 짠맛이 느껴졌다.
“자꾸 별이 늘어요.”
“마음에 들어?”
“예뻐요.”
“아침이 오고 있는 거야.”
그 말을 하며 노노는 더없이 쓸쓸한 눈동자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게야마가 노노의 팔을 토닥였다. 노노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스스로 만든 창에서 눈을 뗀다. 카게야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별이 세차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땅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너무 거세게 내려 이곳이 잠기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노노상은 마법사 같아요.”
“그렇다면 나는 마법사야.”
“제가 또 이곳에 올 수 있다면 그땐 가면을 벗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럴 순 없어. 단호한 목소리가 카게야마를 가로막았다. 노노가 허리를 숙여 카게야마와 눈을 맞췄다. 밤하늘이 가득 담긴 끝없는 남색은 샘마냥 노노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어린애 특유의 오밀조밀한 입술이 삐죽여진다. 모든 것들이 기적 같다.
“마법사라도 자기 가면은 못 벗어요?”
“이곳의 주인이 아직 허락해주지 않아서.”
“치.”
카게야마의 불퉁한 표정이 온 얼굴에 드러났다. 노노가 흘낏 창밖을 바라보았다. 색을 가리듯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날이 밝아옴을 알 수 있었다. 비가 점점 거세졌다. 카게야마가 창문을 완전히 열어젖힌다. 곰돌이 잠옷을 팔꿈치까지 끌어올리고 통통한 팔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바람을 타고 얼굴로 날아든 비에서 소금내가 났다.
어떻게 이 뜨거운 비가 이토록 시리게 내릴 수 있을까.
“노노상.”
“응.”
“울지 마세요.”
카게야마가 흠뻑 젖은 팔을 가지고 노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노노는 카게야마를 마주안을 생각도 없이 눈을 끔벅거리기만 했다. 내가? 운다고?
“아…….”
눈이 감겼다 뜨일 때마다 시야가 뿌얘졌다. 속눈썹에서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허리에 달라붙은 뜨거운 체온이 점차 온몸에 퍼졌다. 배 부분의 셔츠에 작은 물방울이 고였다. 투둑 투둑. 빗소리와 엇박을 이루며 아주 연약한 눈물 소리가 났다. 아래에서 위로 그를 바라보던 카게야마의 코끝을 타고 윗입술로 흘러내린다. 얄팍하고 붉은 혀가 윗입술을 쓸었다. 그가 맛보았던 비와 똑같은 짠맛이었다.
“내가 너를 안아봐도 되겠니?”
“울지, 훌쩍, 마세요…….”
그렁그렁 덩달아 눈물로 젖은 어린 아이가 두 팔을 벌렸다. 노노가 아이를 번쩍 안아들었다. 낮은 책장 위에 앉혀 놓으니 시선이 엇비슷해졌다. 꼬옥. 노노의 팔이 카게야마를 끌어안았다. 답답할 정도로 강하게 껴안은 팔에도 카게야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를 타고 새벽내가 날아든다. 곧 해가 뜰 것 같았다. 먼동이 트고 있었다.
7.
네가 깨어날 시간이다.
8.
“나와 약속 하나만 해 줄래?”
“네.”
“또 나를 찾아오겠다고 약속해줘.”
오동통한 조그만 새끼가 흰 장갑에 가려진 노노의 새끼와 걸린다. 아무 말 없이 엄지를 들어 도장을 찍었다. 손바닥만한 손이 스쳐 지나가며 복사도 한다. 고작 손가락 걸기 약속에 엄중함이 깔렸다.
“코팅도 할까요 노노상.”
“……네가 원한다면 뭐든.”
카게야마가 손바닥을 꾹 눌렀다. 노노의 검회빛 눈동자가 뚫어질 듯 카게야마를 보고 있었다. 창으로 새든 빛에 눈동자가 불그스름하게 반짝였다.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다.
안녕. 또 만나.
9.
헉헉. 눈을 뜬 카게야마의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었다. 꿈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게 생생했다. 관자놀이가 따가웠다. 밤새 울었던 것인지 눈물의 흐름대로 터 있었다. 헐레벌떡 펜과 종이를 가져와 삐뚤빼뚤한 글씨로 꿈 속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적기 시작했다. 다음번에 만나면 책들을 소개시켜 달라고 얘기할 거야. 꾹꾹 눌러쓴 볼펜이 노노의 가면을 그리고 있었다. 빨간 색연필과 보라 색연필을 꺼내 와 꽃무늬까지 그렸다. 노노상에게도 친구가 찾아왔으면 좋겠어. 색칠한 그림이 마르도록 펼쳐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기지개를 폈다. 조그만 거울 가득 통통한 얼굴이 담겼다. 다음 순간 카게야마가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짐옷의 가슴팍 조그만 주머니에 노노의 것이 분명한 노란 꽃이 꽂혀 있었다.
***
전개상 지금 끊었는데 조금 짧아졌네요. 중편에서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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