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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오래된 책방 下
정오 글
김광석-너에게 with. 로이킴
들으면서 썼어요.
***
“오이카와…….”
“…….”
“오이카와.”
“…….”
“오이카와상…….”
오이카와라는 이름을 입 안에 넣고 몇 번 굴러 보았다. 처음 듣고 처음 불러보는 이름이 분명한데 어딘가 쓰고 아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름과 이름 사이에 공백이 자리잡는다. 오이카와의 몸이 아래로 아래로 무너져내렸다. 떨리는 상체가 카게야마의 무릎을 끌어안다가 결국엔 그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는다. 숨은 거칠고 울음은 뜨거웠다.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머리를 아주 천천히 쓰다듬었다.
21.
땅을 뒤흔들 정도로 강하게 내리는 빗줄기는 혹시 당신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22.
“우는 사람을 달래 본 적이 없어요.”
차가운 비바람이 카게야마의 뺨을 스쳤다. 닦을 생각도 없이 가만가만 오이카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열이 오른 얼굴이 뜨겁다. 흔들리는 몸을 어정쩡한 손바닥으로 쓸어 주었다.
“울지 마세요, 오이카와상.”
“한 번만……”
“네?”
“……한 번만 더 불러줘…….”
오이카와상, 오이카와상, 오이카와상. 모두 다른 음높이가 어린 날의 자장가처럼 귓가로 날아들었다. 아주 작았던 어린애의 높은 목소리가 나지막한 어른의 것을 담을 수 있게 되기까지 나는 너를…….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의 팅커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싫어, 카게야마. 나는, 나는! 나는 싫어……. 뭉그러진 목소리가 갈라졌다. 카게야마가 번지는 눈물 자국을 바라보다 오이카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뭐가 싫어요?”
“나는…… 나는…… 나는, 흐윽.”
“……울지 마세요.”
이렇게 당신이 울면, 나는 마음이 아파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진심어린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본다. 특히나 눈동자엔 그 시간을 더 많이 배분했다. 이 세계의 밤과 같은 빛깔. 아주 어두운 파랑. 파란을 철썩이고 떠나갔던 아주 거대한 파랑波浪. 나는 너의 파랑에 빠져 아주 오랜 세월을 헤맸지. 허우적거릴 틈도 없이 아주아주 깊게 가라앉았지. 온통 너만이 가득한 파랑에서 어이없게도 너를 찾기 위해 살아왔지. 시간은 이기적이고 간격은 겁이 난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고 나는 늘 도박같은 기다림을 반복했지. 카게야마, 네 이름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지친 죄를 회상하며.
“왜 울어요?”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줬잖아.”
“바보 같아요. 진작 알려 주셨으면 백 번은 더 불렀겠죠.”
“아니.”
의문이 둥둥 떠오른 얼굴을 보다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돼. 그때는 아직 책방의 주인이 그걸 허용하지 않았거든. 단어를 고민해가며 말을 뱉었다. 뚱한 얼굴이 인상을 썼다. 더 잘 보고 싶어서 눈을 깜빡여 눈물을 털어 낸다.
“그거 하나도 못 어겨요?”
“하하…….”
궁금하네요 대체 뭐 하는 사람이래요?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오른손을 잡았다. 하나의 상처 자국도 허락하지 않는 곧은 손끝과 잘 정리된 손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뺨을 가져다 댄다. 뺨으로 와닿는 온기는 언제나 비현실적이다. 손끝으로 쓰다듬는다. 형체는 늘 네가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한다.
“……네가 아닌 누구를 내가 거역하지 못하겠니.”
무거운 말을 꺼낸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카게야마를 오롯이 올려다본다. 덩달아 그를 응시하던 카게야마는 곧 놀라 입술이 벌어졌다. 흐르는 피같던 붉은색이 스스스 움직이기 시작했다. 변했다. 예전에 잠깐 스쳤던 색으로. 이 색을 표현하고 싶어서 카게야마가 유색의 것들을 머릿속으로 뒤적여 본다. 아무래도 딱 맞는 표현을 찾자면 오후 늦게 티백을 넣어두고선 한참 있다 발견한, 오래 우린 홍차같은 빛깔. 눈동자와 함께 머리도 금세 그 색으로 변했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에도 색깔이 있다면 당신의 눈동자 같은 색이겠지. 적어도 당신이 내게 품은 감정은 딱 그 색이겠지.
23.
그 감정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24.
“이 책방의 그 주인이…….”
“너. 이 꿈은 다 네 것이고 이 책방도 오롯이 널 위한 거지.”
네가 아닌 것들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네 밤의 한 구석에서 널 위한 세계를 만들었고, 책방도 마찬가지다. 말도 안 돼. 혼잣말에 오이카와가 미소를 지어냈다. 이상한 세계라니까.
“책 소개시켜 주세요.”
“응?”
“책방이니까.”
그래.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손을 이끌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나온 서가는 오래된 나무 재질이었다. 아까 읽었던 피터팬이 너저분하게 꽂혀 있었다. 신경에 거슬려 다시 책을 정리해 제자리에 꽂아 놓는다.
“서적 구분은 없어. 애초에 그런 책들이 많지도 않고.”
“그럼 뭐가 있는데요?”
“그냥…… 잡지나, ……뭐 그런 것들.”
책방에?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다시 접어 놓았다. 애초에 이 세계 자체가 이상함으로 가득찬 걸.
“그럼 그거라도……”
“안 돼.”
오이카와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약간 당황한 카게야마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지 못했던 커다란 라디오가 하나 있다. 음악 틀어주세요. 첫 음이 약간 떨린 목소리에 오이카와가 몸을 돌려 오래돼 보이는 라디오를 움직였다. 그를 따라 그쪽으로 향하면서 카게야마가 힐끗 뒤쪽에 있는 서가를 쳐다본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저 서가와 이 서가는 완전히 분리된 느낌이다. 어긋나 있었다. 고오오, 어딘가 위압감이 든다. 오이카와를 다시 쳐다보았다. 언젠가부터 흘러나오던 노래가 빗소리와 섞여 꽤 괜찮았다.
“좋지?”
“네. 가사를 못 알아듣지만요.”
“해석해 줄까?”
끄덕. 카게야마의 고갯짓에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가락에 맞춰 단어들을 짜낸다. 놓치는 문장도 있지만 그가 토해내는 말들은 묘하게 연결된다. 카게야마의 마음이 아렸다. 왜 그런지를 알 수 없기에 더더욱 쓰리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지. 나는 시도해. 그러나 나는 추락하지. ……나는 잠들면 안 돼…… 생각해봐. 우리에게 우리의 삶과 시간들이 있었던 때를. ……안녕을 고하지 마. 나는 두려워. 점차 추워지고 있지. 너의 마지막 한 마디, 우리의 마지막 한 순간. 네게 묻고 싶어. 너는 왜 나를 남겨두고 떠났니?
“……오이카와상. 안 괜찮아요.”
말끝에 물음이 없는 탓에 오이카와가 대답을 망설인다. 안 괜찮아요? 카게야마가 다시 물었다. 그냥 노래일 뿐이야. 가볍게 답한 오이카와에게 카게야마가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제목이 뭐예요? 그 말에 오이카와는 제 대답이 소용없었음을 깨달았다. 카게야마는 이미 답을 알고서 질문을 건넨 것이었다. 그가 괜찮지 않음을, 무엇인가를 자꾸만 그리워하고 또 밀어내고 있음을 눈치 채고서 말을 꺼낸 거였다. 오이카와의 입술이 옅은 호선을 그렸다. 흰 백지에 무엇인가를 쓰려 하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스친 팔꿈치에 실수로 잉크를 쏟은 기분이다. 이것이 좋은 결과를 만들지 나쁜 결과를 만들지 알 수 없다. 그는 그 종이를 뭉쳐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또는 가득한 잉크를 연결해 무엇인가를 창조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다. 상대가 카게야마인 이상 오이카와에겐 한 가지 결말밖엔 없었다. 목소리를 낸다. 아주 오랜만에 낸 것처럼 뻑적지근하고 칼칼하다.
“You said you’d grow old with me.”
사각사각. 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이 흔들거린다. 카게야마가 손을 뒤로 뻗어 탁자를 짚었다. 오이카와의 말이 시발점이 된 듯 기억이 소용돌이친다. 없다. 저는 저런 말을 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기억은 자꾸만 제게 무언가를 떠올리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얼굴이 오이카와의 얼굴을 마주했다. 끄트머리가 차가운 손바닥이 뺨에 닿아 온다.
“괜찮아.”
“…….”
“정말 괜찮으니까 나…….”
그는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괜찮음을 얘기했다.
25.
꿈을 꾸는 간격이 넓어졌다. 점차 벌어져 간다. 카게야마가 노란 꽃이 든 유리병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그러고보니 꽃의 종류를 궁금해 한 적이 없었다. 제 꿈 속의 세계라면, 오이카와라면 분명 꽃 하나도 이유 없이 두지 않았을 터인데.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사진 검색을 하자 똑같이 생긴 사진들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제비꽃?”
보라색이 아닌, 노랑 제비꽃. 꽃이라면 작은 장미도 있고 벚꽃도 있을텐데 왜 그는 하필이면 가슴팍에 이렇게 작고 흔한 노란 풀꽃을 꽂았을까. 궁금증이 인 카게야마가 스크롤을 아래로 내린다. 계절, 종류, 볼 수 있는 시기……. 수많은 정보 중 하나가 눈을 사로잡았다.
노랑 제비꽃은 1월 9일의 탄생화였다. 1월 9일에 무슨 일이 있었나? 가만가만 기억을 되짚어보다 갑자기 울려오는 머리를 주먹으로 퍽퍽 두드렸다. 휴대폰을 옆에 던지고는 침대에 드러눕는다. 마지막 꿈을 꾸고 난 이후부터 깨질 것마냥 날카롭게 찾아오는 두통이 잦아졌다. 몇 분 내외로 아주 짧게 찾아오긴 하지만 카게야마의 모든 행동을 멈추고 머리만을 감싸쥐게 만들 정도로 심한 고통을 준다. 맥락 없이 문득문득 찾아오기에 약도 소용이 없었다. 눈물이 핑 도는 눈 위를 핏기가 사라진 손이 덮는다. 눈물을 내보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으면 오이카와의 표정이 어른거렸다. 왜? 대체 왜? 궁금한 것이 차고 넘친다. 그는 누구이며, 왜 이토록 오래 제 꿈에 나오는 것인지.
“아.”
뜬 눈에 형광등 불빛이 그대로 쏘아진다. 인상을 쓰고 확 고개를 돌렸다. 벽에는, 어제 빤 제 경기복이 걸려 있다. 그것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깜빡거리던 눈이 크게 떠졌다. 검은 제 경기복 중앙에는 커다랗게 9가 그려져 있었다. 으으. 다시 저릿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암전된 시야로 영상같은 화면이 펼쳐진다. 찍, 찌직. 통, 통, 통……. 익숙한 소리다. 배구화가 체육관 바닥을 스치는 소리. 공이 튕기는 소리. 그리고 나는 땀 냄새와 탈취제 향기. 제 주변에서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향이 이상하게 너무나 익숙했다. 으으으……. 제가 입고 있는 옷은 파랗다. 중학교 때의 배구 경기복이다. 마지막으로 눈을 굴렸다. 누군가의 뒷모습이다. 더 자세히는 보이지 않는다. 짙푸른 체육복. 등에 박힌 1이라는 숫자. 그 아래에 그여진 직선.
—쨩! —오쨩!
눈앞의 등은 순식간에 더 넓어졌다. 이번엔 하얀 경기복이다. 하얀 경기복에 민트색으로 쓰여진 1. 아래에 그여진 직선. 환청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아주 익숙하다. 그러나 그가 부르고 있는 것이 확실히 들리지 않는다. 도무지 닿으려 하지 않는 등을 팔을 마구 휘저어 붙잡았다. —쨩? 눈앞의 그가 몸을 돌림과 동시에 까무룩 영상이 사라진다. 시야엔 익숙한 길이 펼쳐진다. 잠이 든 거였다.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꽉 깨문 카게야마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오랜만이에요. 오이카와상.”
“까먹을 뻔했어.”
빙글빙글 웃는 낯의 오이카와가 카게야마를 맞이했다. 뜨뜻하게 올라오는 감정은 무시한다. 매일 그리워하는 눈동자에 제 얼굴이 가득 맺혔다. 활짝, 더 활짝 웃어낸다.
“카레 먹고 싶어요.”
“응?”
“돼지고기 넣어서 온천계란까지 얹어 주세요.”
쨍그랑 쨍그랑. 오늘따라 풍경이 더 높은 소리로 울렸다. 저녁 즈음의 겨울바람이 카게야마의 폐를 헤집고 지나간다. 코를 스치자 핑 눈물이 도는 걸 애써 털어냈다. 익숙해진 맨발이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카게야마를 못 보던 얼마동안 오이카와는 창가에 안락해 보이는 의자 하나를 놓았다. 카게야마를 그곳에 앉혔다. 고동색의 의자와 그는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린다. 됐다고 거절하는 것을 굳이 담요까지 둘러준 채 부엌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
살며시 카게야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에 힘을 주고 살금살금 서가로 걸어갔다. 오이카와가 피터팬을 꽂아두던 가까운 서가를 지나, 먼지가 제법 쌓인 서가도 지나, 매일 그가 관리하는 가장 안쪽 서가로. 카게야마의 청각이 곤두섰다. 오이카와는 그가 이 서가에 관심을 갖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카게야마의 호기심은 아까 펼쳐진 영상같은 꿈에 몇 제곱으로 불어난 뒤였다.
26.
별거 없는데. 몇 분을 서가를 서성인 카게야마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의 말 그대로 서가는 잡지로 가득했다. 여러 권의 잡지와 손으로 제본된 듯한 책들. 손끝으로 책 모서리를 쓸어 보았다. 모난 것이 콕콕 손가락을 찔렀다. 그냥 아끼는 거라 싫어했던 건가? 생각하며 뒤를 돌던 찰나 카게야마는 말이 안 되는 수의 배열을 보게 된다. 잡지 옆면에 조그맣게 새겨진 글씨는 분명 올해 연도와 일치했다. 문제는 월과 일이었다. 대회를 준비하며 어제 달력을 보았기에 확실하다. 지금은 7월, 한참 매미가 우는 시기다. 그런데 올해 잡지의 개수는 정확히 열두 권. 맨 마지막 잡지에는 당연하단 듯 12월이라고 쓰여져 있다.
“말도…… 안 돼.”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어 3년 전 날짜의 잡지를 집어들었다. 그가 사는 지역의 지방 잡지다. 목차를 살피니 올해의 배구 란이 보였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자 그가 3년 전에 보았던 고교 팀이 한 면을 가득 채우고 두 번째 페이지는 시라토리자와 중학교의 우승 소식이 한 면을 가득 채웠다. 황급히 세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앳된 느낌의 오이카와가 있다. 떨리는 눈동자가 억지로 글자를 밀어넣는다.
[키타가와 다이이치 오이카와 토오루 베스트 세터 상]
“……!”
아니다. 3년 전에 베스트 세터 상을 받았던 건 그가 아닌 시라토리자와의 세터였다. 그때 상을 받는 그를 바라보며 저도 3년 뒤에 베스트 세터 상을 받겠다고 다짐했기에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데 그 페이지 어디에도 시라토리자와의 세터가 상을 받았다는 글은 없었다. 아까 보았던 파란 키타가와의 경기복이 떠올랐다. 선명하게 적힌 1과 언더바로 표시된 주장 마크. 조금 더 자란 등. 여전히 달린 주장 마크. 고장난 텔레비전마냥 빠르게 두 개의 기억이 반복된다. 덜커덩. 휘청인 몸이 서가에 닿았다. 어어……! 카게야마가 어떡할 틈도 없이 그 부분의 잡지들이 무너져내렸다. 오이카와가 못 들었기를 바라며 잡지들을 성급하게 꽂아넣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기억은 온통 뒤섞여 제가 어디를 살고 있는지조차 헤매일 정도였다.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올해 8월의 잡지를 집어들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오이카와였다. 분노한 얼굴 근육들이 제작기 꿈틀거렸다. 스산한 기운이 카게야마를 덮친다. 소리치는 목소리는 제가 알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이상한 기억이 나를 찾아와요. 카게야마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처음 보는 기억인데, 날 찾아온다고요. 머리가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 나한테 말한 겁니까? 나는 이게 대체 무슨 기억인지, 당신은 누군지 모든 걸 알고 싶어요! 왜 내가 이 서가에 관심 갖는 걸 그렇게 싫어했어요?!”
“…….”
“내가 주인이라면서!”
“네가 원하지 않았으니까! 네가 싫어했으니까!”
27.
너는 기껏 세상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러나 태양은 여전히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달을 오한이 들 정도로 꽁꽁 얼어 있었다. 네가 그리웠다. 네게 사랑을 속삭이지 못했던 날들을 지나치고 나자 남은 건 거대한 후회 덩어리였다. 그러나 도망친 너를 내가 잡을 수 있나 백 번을 고민해도 내게 그런 자격은 없었다. 네 세계를 사막으로 만든 것은 나다. 너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선을 그려가며 우리의 평행을 깨려 했지만 나는 그 선을 똑같은 거리에서 똑같이 따라해 네가 우리의 평행을 깰 수 없게 만들었다.
와장창 평행을 깨려 애쓰던 네가 깨어지고 나서야 처절한 후회가 나를 감쌌다.
너는 이 세상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28.
“기억. 그래 기억. 카게야마, 네 이름이 뭐지?”
“네?”
“네 이름. 카게야마 뒤에 붙는 이름.”
“그거야 카게야마, ……. 아……. 아?”
이름이 안 떠오르지? 텁텁한 목소리가 부서졌다. 불같이 화를 내던 오이카와는 이제 아무 감정 없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를 툭 건들면 모래처럼 무너질 것 같았다. 있지. 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지만 네 이름만큼은 도무지 기억이 안 나더라. 메마른 음성이 조그맣게 귓바퀴를 타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곱게 잠들었던 각질이 하나둘 일어나 오이카와의 이로써 뜯겨 나간다. 너덜너덜해진 입술 위로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기껏 카레 만들었는데.”
“…….”
“하하…… 좋게 끝내고 싶었는데.”
왠지모를 체념이 서린 눈은 울기 전의 그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게야마가 제 몸을 바라본다. 오늘은 체육복을 입은 채로 누워서인지 잠옷이 아니다.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휴지 쓰세요?”
각 잡혀 접혀 있던 휴지를 꺼내 오이카와에게 내밀었다. 오이카와가 이마를 짚었다. 붉어진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위화감이 들었다. 기억하지 못할 리 없는 말이 고대로 귓가를 파고든다. 휴지를 잡아들었다. 동시에 세계가 마구 흔들린다. 놀란 표정의 카게야마에게 눈인사를 했다.
설명해 주고 싶었는데. 네게, 정말로 설명해 주고 싶었는데. 겁이 나서 말하지 못했다. 네가 내 이름을 알게 되면 이 세계가 무너질 거라고 말하지 못했다. 어차피 너와 평생 함께할 수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었다. 언젠가 우리가 만들었던 연결고리는 쇠사슬처럼 우리를 억압했다. 너를 잃고 나자 죄가 되어 나풀거리던 나의 이름과 너의 이름. 모든 열쇠는 네 손에만 존재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우리는 부서진다. 나는 네 이름을 찾지 못했고 다시 또 억겁의 시간을 잠들어야겠지.
29.
아아. 이럴 줄 알았더라면.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
30.
오이카와는 잠깐 눈물이 그치길 바랐다. 지금을 다해 카게야마를 눈에 담고 싶었다. 원망스럽다. 마지막은 아름답게 꾸미고 싶어 애썼는데 결국엔 우는 낯으로 화를 내며 그를 떠나보낸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떠먹는 카레에선 눈물 맛이 났다. 꾸역꾸역 식도를 타고 흐르는 카레가 차갑게 굳어 있었다.
***
그러나.
31.
하나도 잊히지 않아.
카게야마가 심호흡을 했다. 입김이 풀풀 피어오르는 날씨다. 오이카와가 있던 세계의 그것 같은 기온. 훨씬 자란 듯한 눈동자에 하늘이 어린다. 몇 번을 앓았다. 열이 오르고 목이 붓는 아픔이 아닌 마음이 미어지는 듯한 이픔에.
“오이카와 토오루.”
그의 전체 이름을 되뇌어 보는 것은 하루 끝의 루틴이 되었다. 꿈도 여러 번 꿨다. 물론 오래된 책방이라거나 오이카와가 나오진 않는다. 그냥 아주 어릴 때 꾸곤 했던 그런 꿈들일 뿐이었다. 늘 허탈한 표정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제발 좀 사라졌으면 하던 두통이 그립기까지 하다.
“안녕.”
산사를 찾아가 사 온 조그만 풍경 아래에 유리병을 매달았다. 메말라 버린 제비꽃이 바스락 그에게 인사한다. 창문을 열고 손끝으로 병을 톡 치면 딸랑거리는 소리가 방을 채운다. 그리움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오늘 밤도 다시 한 번 오이카와를 만날 수 있길 기도할 것이다.
사실 기억이 떠오른다거나 하진 않는다. 애초에 오이카와가 찾던 ‘카게야마’ 와 제가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카게야마에게 조금도 유념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는 그일 뿐이고 저는 저일 뿐이므로. 오이카와가 무엇에 매여 그토록 아파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봐온 만큼 아파했으면 된 거 아닐까 생각한다. 카게야마가 제 이름 일곱 자를 쓴 종이를 잠옷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잊더라도 읽어 줄 참이었다. 눈을 감는다. 정신없었던 하루의 끝에서 그를 청해 본다.
32.
손을 뻗었다. 잘 아는 공기다. 하늘의 색은 제 눈과 완벽히 같았다. 처음 왔던 때처럼 안개가 가득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오래도록 원하던 꿈 안으로 들어왔음을 직감했다.
“오이카와상.”
대답은 없다. 진공에 홀로 떨어진 것처럼 길조차 없는 무無의 공간이다. 카게야마가 습관처럼 주머니를 더듬었다. 종이가 부스럭거리며 손에 잡혀 오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꾸욱 깨문다. 이상한 믿음이 피어올랐다.
“오이카와상!”
안개가 서서히 걷혀 가는 게 보인다. 자신감을 얻은 목소리가 더 큰 소리로 오이카와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시야가 넓어진다. 길 같은 건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카게야마가 울컥 넘어오는 감정을 뱉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오이카와상! 지금 어디 있어요?
“오이카……”
말을 늘였다. 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름. 오이카와는 제 이름을 모른다고 했고, 오이카와의 이름을 알게 되어 이 세계는 무너졌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면 어떨까. 매일 밤마다 하늘을 보고 부르곤 했던 이름을. 카게야마가 크게 숨을 쉬었다. 가장 큰 바람을 담아서.
“토오루! 토오루상! 오이카와 토오루! 내 이름 아직 모르잖아요! 제발! 제발…….”
땅에 엎드렸다. 제맘대로 새나오는 눈물을 벅벅 문질러 닦는다. 누군가는 미쳤다고 허상일 뿐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제가 경험한 세계였다. 이곳은 분명히 존재하고 명확히 실재한다. 사악. 카게야마의 바람이 닿았는지 얇은 커튼처럼 안개가 걷히고 그 자리에 작은 길 하나가 생겨난다. 카게야마가 첫 걸음을 걷는 애처럼 한 발을 내딛었다. 이내, 달리기 시작한다. 딸랑, 쨍그랑. 그리워했던 풍경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안녕.”
울고 있었다. 당신은.
“오이카와상.”
처음 만났던 날처럼 메디코 델라 페스테가 당신의 얼굴을 가렸다. 카게야마가 성큼 오이카와에게 다가섰다. 메마른 어깨가 흠칫 떨린다.
“사라지지 마세요.”
주머니 안에서 꼭꼭 접힌 종이를 꺼내들었다. 활짝 펼쳐 보이지만, 제 이름은 들어있지 않다. 당황한 얼굴로 기억을 굴렸다. 기억나지 않는다. 젠장, 젠장. 작은 욕설을 뱉으며 카게야마가 마른세수를 했다. 툭. 땅으로 떨어지는 종이를 보니 억울함에 미칠 것 같았다. 어린 날 할머니 집에 있던 작은 수도꼭지를 움직인 기분이었다. 끼릭 끼릭 아무리 오른쪽으로 돌려도 나오지 않던 물은 어느 순간 강하게 터져나왔고, 카게야마의 옷을 모조리 적신다. 기껏 참아왔던 눈물도 꼭 그처럼 허망하게 터져나왔다. 이젠 할 수 없다.
“오이카와상. 제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좋아해요. 너무 좋아해요. 정말로 좋아해요. 많이, 많이…….”
주먹으로 마구 눈물을 닦으면서도 오이카와를 보는 시선은 올곧았다.
“어어…… 울지 마세요. 왜, 왜, 웁니까. 흐윽…… 제가 다 잘못했어요. 울지, 울지…….”
33.
그러니까 떠나지 마세요.
나는 당신이 아픈 걸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테니까.
34.
오이카와의 눈에서 한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파르르 떨리던 턱은 울음을 참기엔 부족한 보洑였다. 흐느끼는 목소리는 커다란 울음으로 터져나오고 짐승의 것마냥 언어를 잃은 울음소리가 목을 긁었다. 카게야마가 어쩔 줄 모르는 몸짓으로 오이카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은 잔뜩 열이 올라 뜨거웠다. 오이카와가 주저앉았다. 한참을 고개를 떨군 채 울었다.
“……나를 봐.”
맹맹한 목소리에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이카와가 떨리는 손을 얼굴께로 가져간다. 평생을 저주처럼 그의 얼굴을 가려왔을 가면이 너무도 허망하게 벗겨졌다. 카게야마가 눈을 깜빡였다. 아름다운 얼굴이 오직 저만을 가득 감고 있었다. 오른손을 내밀어 뺨을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낸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이카와는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입술이 열린다. 자장가의 노랫말처럼 아주 따스한 목소리였다.
“네가 그 말을 하게 되기까지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렸단다.”
—사랑하는 토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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