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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밤의 강에는 그림자가 지지 않는다 0


프롤로그


정오 글


***


화이트톤으로 꾸며진 방 안, 두 남자가 있다.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쪽은 영 흥미가 없는 표정이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덜덜덜 떨리는 팔로 가방 하나를 맞은편 남자에게 건넨다. 째깍째깍 초침이 흐르는 소리에 맞춰 심장도 그 속도를 빨리한다. 그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연배의 남자는 그것에 손을 댈 생각도 없는지 따분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다. 조급해진 남자가 이제는 땀까지 가득 찬 손을 들어 가방을 열었다. 한 장만 해도 꽤 큰 돈이 될 수표들이 오십 장씩 묶여 빼곡히 줄을 섰다. 내심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지만 상대는 마치 얼음장같이 냉랭하다.


“저, 올해는……”
“들어와.”


더듬더듬 꺼낸 말을 삭 잘라버리고 입술을 움직였다. 듣기 좋은 미성은 남자에게 말할 때보다 훨씬 더 부드럽다. 남자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감각을 곤두세워 보지만 그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입을 다물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에 번들거리는 이마를 닦아내고 다시 주머니에 그것을 넣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문이 열린다. 저벅저벅 발소리를 숨길 생각도 없이 공간을 깨는 이를 쳐다보다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이쪽은 처음 보는 남자다. 채도 옅게 날리는 분홍 머리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닦아낸 것은 소용없었다는 듯 다시 땀이 흘러내린다.


“이번엔 다테.”


들고 있던 봉투를 건네자 언제 따분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붉은 눈이 반짝거린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하는 말에 분홍 머리의 남자가 매서운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감히 관여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궁금증이 가시질 않았다. 흘낏거리며 그가 봉투를 여는 것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봉투를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뭐해?”
“네? 아, 하하하……. 사장님께서 참 뭐랄까, 아무 말도 없으셔서…… 하하.”


분홍 머리 남자와 말을 섞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목소리엔 미미한 즐거움이 배여 있었기에 남자도 웃음이 스민 말을 건넨다. 기대가 섞인 말의 무게는 붉은 눈의 남자와 이야기하던 때보다 훨씬 가볍다. 거드름을 피우고 싶어진다. 저는 이곳의 우두머리와 거래를 하러 온 것이지 더미로도 보이지 않는 이와 얘기를 나누러 온 게 아니라는 뜻을 은근슬쩍 내포한다. 삐끗. 머리보단 짙은 분홍색 눈썹이 잠깐 어긋난다.


“들고 나가.”
“예? 험험, 사장님은 아무 말도 없으신데.”
“올해는 포기해.”


울컥 화가 터져나온다. 아직 그의 보스는 아무 말도 없는데 괜시리 남자가 이래라 저래라 입을 놀리는 게 우스웠다. 바닥에 달라붙을 듯 기었던 태도를 살짝 바꾼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가방을 다시 남자의 편으로 밀었다. 남들은 존재도 모르거나, 안다 해도 얼굴 보기가 어렵다는 이곳 수장을 저는 두 번이나 만나보았다.

저도 위치가 위치인데.


“저와 사장님이 얘기하는 자리인데…… 말입니다.”


거만한 목소리가 땅을 끌자 그제야 남자가 들고 있던 봉투를 책상 위로 올려놓는다. 팔짱을 낀 채로 그를 빙글빙글 고개까지 돌려가며 뜯어보았다. 재미있다는 시선이 담겼다. 비죽 웃음을 흘린다.


“그러니까 사장님,”
“으응, 그러니까 나랑 몇 번 봤다고 제법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는 거구나. 이거.”
“……그게 무슨 말씀……”


정곡을 찔렸다. 애써 당황한 말투를 삼킨다. 남자가 그와 눈을 맞추었다. 어두운 홍차 빛깔의 눈동자는 한 치의 감정조차도 읽을 수 없다. 그 근원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아우라가 남자의 몸을 타고 흐르다 그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일이 단단히 꼬였음을 느낀다. 남자와 얼굴을 마주본다는 건, 그로서는 거대한 관용을 베풂과 동시에 배신을 견제해야 할 적이 생기는 것과 같다는 게 이제야 피부로 와닿는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이상 선을 넘지 말라고.


“오이카와. 나 좀 짜증나려고 하는데.”


분홍 머리, 하나마키가 오이카와를 짜증 섞인 눈으로 쳐다봤다. 애초에 그가 부탁한 일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발을 들일 필요가 없을 터였다. 미안. 생글거리며 그에게 사과를 한 오이카와가 고개를 돌린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가 싹 사라진 얼굴이었다.


“말 못 들었나? 들고 나가라고 그랬잖아.”
“돈은 제가 사장님 선물이라고 들고 온……”
“구차하게. 응?”


건조한 목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턱 숨이 막혔다. 목구멍을 무언가 강하게 죄어오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은 압력으로 인해 곧 터질 것 같았다. 귀는 이명으로 웅웅 울린다. 불찰이었다. 뺨으로 흐르는 눈물은 모두 그의 죄였다. 지금 저를 옭아맨 건 눈앞에 있던 분홍 머리 남자의 능력이 분명하다. 공격형일까? 아닌가? 아니, 이런 추측은 허무하리만큼 소용이 없다. 이곳 아오바죠사이에서 그의 우두머리를 이름으로 툭툭 부를 만한 남자라면 애초 모든 면에서의 능력이 출중할 테니까.


“살려…… 살려…….”


눈앞 어딘가를 향해 마구 바르작거리던 손발이 멈춘다. 째릿 하나마키를 노려보지만 하나마키는 “안 죽였어. 안 죽였어.”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오이카와가 봉투를 집어든다. 어두운 초록색 봉투의 겉면엔 다테 특유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하나마키의 손을 타고 왔다면 위조되었다거나 약이 묻었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확인 절차는 필수다. 또박또박 정자로 적혀 있는 모니와 카나메 여섯 글자를 응시한다. 포지션은 저와 같다. 매일 밥 먹듯 그려야 하는 능력이 몸을 맴돈다. 오른손을 얹자 화르륵 글자들이 빛을 뿜어냈다. 동시에 코끝을 감도는 유자 향기에 코를 쓱쓱 문지른다. 후타쿠치 쪽에 비하면 다정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하며 봉투를 열었다. 전부터 반짝이던 눈동자는 안에 든 글을 읽으며 점점 더 흥분에 차기 시작한다.


“건물상태 오프로 돌리고 위로 올라와.”


책상 위에 있는 조그만 버튼을 누르고 이야기한다. 그가 그 말을 하고 얼마 흐르지 않아 하나 둘 이곳의 메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쭈욱 고개를 돌려 익숙한 얼굴들의 수를 센 오이카와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들어 보이고는 입술을 열었다.


“재밌는 일이 생겼어.”


최근 얼마간 암암리에서는 흥미로운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온몸을 검은색으로 감싼 괴한이 여기저기에 나타난다는. 그가 노리는 것이 밤의 클럽에서 술담배와 마약을 흡입하는 재미로 사는 일개 조무래기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소문에 흥미를 붙이기에 충분했다. 그가 주로 건든다고 알려진 것은 이쪽 지역의 정경政經을 주무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몇 개의 조직들. 크기가 작기에 이를 조직이라고 불러야 할지 팀이라고 불러야 할지 다소 애매한 감이 있긴 하나, 외면적으로만 보아도 거미줄마냥 그들끼리 세력진을 형성하고 그 진들이 도시마다 하나씩 존재한다는 점에서 아주 견고하고 또 강하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게다가 그들의 거처는 겉보기엔 작은 흥신소나 동네 빵집같은 형태를 띄고 있기에 찾겠다고 해서 쉬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들은 두 가지 정도의 정보를 추론해낼 수 있었다.

하나. 괴한은 각 그룹들이 결계를 몇 겹으로 둘러 감춰놓은 거대한 건물을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둘, 경계가 삼엄한 그곳의 문을 치명상 하나 없이 열 수 있을 만한 실력이라는 것.

그러나 대개는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다음 소문에서 흥미를 팍 죽이곤 했기에 더 이상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진 않는다. “그럼 그렇지. 소문은 역시 소문이네.” 하며 맥빠지게 만든 두 번째 소문. 그것은 그 괴한을 상대한 조직들의 태도였다. 우선은 죠젠지. 늘상 웃는 낯을 가졌으나 그만큼이나 친밀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곳이다. 개개인이 사용하는 능력의 개수도 많고, 괜찮은 게 생겼다 싶으면 기필코 저들의 것으로 사용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룹이라 —뭐 다른 조직도 다 비슷하겠지만—상대하기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죠젠지는 왜인지 수장 테루시마까지 나서가며 그 괴한을 직접 맞았고 필요한 정보를 내주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 오이카와는, 여기까지는 그다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다테가, 문을 활짝 열었다잖아.”


다테. 철벽이라는 명칭이 붙었을 정도로 수비형 능력이 출중한 조직이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와해된 파派의 구성원 몇몇이 앙심을 품고 뭉쳐 한꺼번에 여기저기를 공격한 적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오바죠사이도 피해를 입었을 뿐더러 정신없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다테의 문만큼은 열리지 않았고, 그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견고하고 강한 수비 체계는 그 바닥 이들의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런데 그런 다테가, 싸워서 진 것도 아니고 어서옵쇼- 문을 열었다는 것은.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을 썼어. 원하는 건 우리가 가진 몇 가지 정보들이었고,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내줬어.」


호기심이 증폭된 것은 모니와가 보낸 편지가 이유였다. 평소 꼼꼼하고 섬세한 그답지 않게 두루뭉술한 글을 적어 보냈다. 다테가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정보를 내줬다? 머릿속 지도를 펼쳐 다테와 죠젠지의 교집합을 세아려 본 오이카와가 탁자를 탕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밖을 무심히 응시하다 다시 팀원들의 얼굴을 보고선 씨익 미소를 짓는다. 하얀 이는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난다. 섬뜩하리만큼 즐거워 보이는 미소가 광狂적이다.


“재밌지 않아?”
“그건 그렇고,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냐.”
“그래. 일단은 보초 서던 애들 물리고 킨다이치랑…….”


익숙한 듯 작전을 술술 내놓기 시작하는 동료들을 훑으며 오이카와가 박수를 짝짝 친다. 모두의 입은 순식간에 다물리고 여러 쌍의 눈이 그를 향했다.


“보초는 그대로 세울 거야. 줄일 것도 늘릴 것도 없어.”
“…….”
“그리고 만에 하나 놈이 나타난다면 내가 직접 나서.”


반박은 안 받을게. 빙글빙글 웃은 오이카와가 제 의자에 풀썩 앉는다. 하지만 오이카와!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 여러 군데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과 걱정은 다시 탁자를 탕탕탕 치는 오이카와에 처참히 묵살된다. 실질적 명령권을 쥔 게 그임을 알고, 또 어느 정도의 계획은 이미 머릿속으로 짜 놓은 상태라는 걸 알지만 그걸 다 고려한대도 위험한 결정이다. 게다가 괴한이라는 이가 어느 정도로 강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떠한 어림짐작도 감도 허용하지 않는 오이카와가 내린 결정이라기에 너무도 이례적이었다.


“오이카와. 어떤 이유로 아무 설명도 없이 네가 나서겠다는 결론을 내린 건데? 누가 뭐래도 너는 아오바죠사이의 핵이고, 너 자신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걸 네가 더 잘 알지 않냐.”
“그래. 네가 흔들리면 그건 곧 아오바죠사이가 흔들리는 거잖아.”


아무 말도 없이 제자리에 서있던 마츠카와가 툭 말을 던진다. 기다렸다는 듯 하나마키도 덧붙인다. 할 수 없네. 양손을 척 허리께에 올린 오이카와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웃고 있는 즐거운 낯이었다.


“으응. 왠지……”


누군지 알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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