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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밤의 강에는 그림자가 지지 않는다 24


***


느슨한 날들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당 쪽이 잠잠하니 대외적으로 그만큼 신경 쓸 일은 없다. 우선순위는 높으나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건들을 오른쪽에 내려놓았다. 착착 정리되는 문서에 기분이 느긋해졌다. 늘상 날 서있는 것치곤 제법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발주 넣은 건?”
“여섯 시 안으로 도착 예정입니다.”


그래. 고갤 끄덕거렸다. 차가워진 손끝을 바지에 슬 문질렀다. 온풍기를 좀 더 세게 틀어야 하겠다.

저녁은 여섯 시에 당겨 먹었다. 평범한 식사였다. 창밖은 어스름이 내려, 원하던 시간대다. 반지라도 들어야 할 법한 조그만 벨벳 상자를 주머니 안에 넣었다. 카라스노에 갔다면 격이 맞겠지만, 아직은 쉽지 않았다. 사와무라만을 이쪽으로 부른 것은 부득이했다. 달그락달그락 나는 소리에 표정 없던 얼굴에 온기가 생겼다.


“토비오 쨩, 소꿉놀이 해?”
“아.”


찻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걸 보면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그는 나서서 하는 기다림엔 익숙지 않아 보였다. 고작 사와무라를 만나는 일인데. 딱 소리를 내며 꺼진 커피포트 안 물을 흰 차 주전자에 따랐다. 비공식적인 일이지만 격식을 차리는 게 더 의미 있을 것이다. 몇 번의 형식적인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이어 사와무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인사 두 번을 건네더니 익숙하게 자리에 앉는다. 마른 꽃이 있었던 찻잔에 물을 붓자, 서서히 노란 물이 우러나왔다.


“유채꽃.”


그는 묻지 않아도 알아서 대답했다. 노랗게 물든 들이 아름답다고 했던 어젯밤은 오늘을 위한 준비였을까. 여기저기 섬세한 구석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차를 아주 조심히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카게야마. 오늘 할 말은 별건 아닌데.”
“네.”
“이젠 너도 알겠지만, 너를 가둔 사람의 상사의 상사쯤 되는 사람이 제법 위험한 사람이야.”
“……아.”
“아마도 그래서 오이카와도 이렇게 너를 꽁꽁 숨기고 있는 걸 거고.”


공식적인 활동은 힘들 거라는 게 이런 말이었나. 카게야마가 그다지 놀란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를 한번 죽였던 사람인데, 숨기고 있다던 것쯤이야 놀랍지 않았다. 그도 대충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멋쩍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뭐, 상관없는 일이다.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크게 단맛이 나지는 않았다.


“대신, 비공식적인 활동쯤은 충분히 가능하지.”
“네. ……네?”


지금 뭐라고……. 큰 눈이 배로 커졌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생각하려 애쓰던 그의 앞에 사와무라가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딸깍 잠금쇠를 풀자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장신구가 있었다. 백금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원 안, 검은 보석으로 조각한 까마귀. 그리고 목걸이 끈.


“로열패밀리. 무슨 중세 유럽 어디의 왕 놀이를 하자는 게 아냐.”


조직의 주요 인물이라는 증거, 그의 발길이 지닌 무게. 유사 시라도 센터로 연결돼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생존이 절대적으로 유리해진다. 장신구는 주로 커프스 버튼으로 쓰이지만 카게야마는 드러나서는 안 되는 패. 목걸이 끈의 의미는 그것이었다. 카게야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카라스노의 구성원 카게야마 토비오. 영원히 가질 수 없을 거라 생각해 애초에 쳐다보지도 않았던 이름이었다.


“받을 거지?”


상자를 받아 든 손이 섧게 떨렸다.


“그리고 이것도.”
“감사합니다. 뭐라고 더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오이카와 작품이긴 한데.”


그렁그렁한 눈이 오이카와의 눈과 슬그머니 마주쳤다. 매끈한 안구는 유리처럼 부서질 듯 반짝거려, 괜히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훨씬 더 두꺼워진 것은 사진이었다. 그가 그리워하던 모든 인물들이 사진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양한 표정, 다양한 포즈, 그러나 너무나 확신에 가득 찬 행복들. 그들을 머리로 떠올리면 자연히 그들의 플레이 방식도 연관돼 따라왔다. 홍조가 올라온 얼굴은 겨울을 처음 만난 애처럼 기쁨이 가득했다. 더듬더듬 목걸이를 착용하려 하자 오이카와가 그것을 빼앗아 대신 목에 걸어 준다. 잘 어울린다, 안목이 있다니까. 사와무라가 농담처럼 웃는 말에 심장이 부푸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 잠깐 좀.”
“아, ……얘기 나누고 있어.”


단내 나는 분위기를 부순 건 하나마키였다. 그는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어 그를 불렀다. 깨진 분위기를 뭉뚱그려 무마한 오이카와가 그런 그를 따라나선다.


“맛층?”


그에게선 미미한 담배 냄새가 났다. 아오바죠사이 내에서 담배를 즐겨 피는 건 마츠카와뿐이다.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심각한 일이 아니길 빌었는데, 물론 하나마키가 대화 도중 급하게 그를 불렀다면 심각하지 않기가 더 어려울 테지만. 설마 그렇겠어. 설마가 끼어든 문장은 꼭 그대로 되고야 마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하나마키가 종이 뭉치를 그에게 내밀었다.


“보여?”
“……어.”
“여기 이게, 나카무라 상 그래프.”
“…….”


종이를 받아 든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머리가 아찔했다. 하나마키는 마츠카와와 꽤 오래 얘기를 나눈 것 같았는데, 북동에 다녀왔다고 했다. 예민하게 그곳을 관찰하던 건 선견지명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그는 피곤해 보였다. 이틀 정도는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곤 곧장 마츠카와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중앙 건물에서 피웠던 담배가 문득 아른거리는 건지.


“씻었네?”
“저, 오이카와 상! 드릴 말이 있는데요.”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둘 중 하나면 들을게.”
“감사드립니다.”


아. 데자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차마 말할 타이밍을 잡을 수 없는 사실들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게 이렇게 양심에 찔릴 줄이야. 그 모든 인재人災에 제 탓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간에.

전혀, 대답하곤 조금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적시고 평소보다 느릿느릿 머리에 샴푸를 칠한다. 오래 욕실에 있었는데도 생각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는다. 괜히 카게야마를 위해 놓아둔 컨디셔너를 들어 보았다. 이걸 쓰면 너처럼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나. 헛헛한 생각.


“피곤하십니까?”


똑같은 향기. 그가 다가오자 훅 끼치는 향에 움찔 손가락이 떨렸다. 샤워가운을 대충 묶은 손이 발그스름했다. 왜일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얼굴에도 열기운이 가득했다. 그가 한 발자국 더 다가오면, 향에 열까지 더해져 난로처럼 뜨겁다.


“짜잔.”
“……?”


반지가 들어야 격에라도 맞을 법한 작은 상자가 마법처럼 그의 손에 나타났다.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한 것은 열어보라는 의미이니, 카게야마가 상자의 뚜껑에 손을 댔다. 그건 한 변에 경첩을 달아 꽤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상자 문이 열리자 그를 쳐다본 눈이 조심스러웠다.


“토비오는 내가 더 사랑하는데.”
“…….”
“신원을 두 번 증명할게. 오이카와 씨의 이름으로.”


그곳엔 하나마키의 커프스 버튼과 비슷한 모양인 푸른 보석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목걸이에 함께 걸 수 있게 작은 링을 달았다. 보석을 뒤집으면 새겨진 푸를 청靑 자와 내 천川 자. 차례로 아오바죠사이와 오이카와를 의미하는 한자였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었다. 손을 몇 번 움직이자 흑색의 까마귀 옆에 조그만 동그라미 하나가 자리했다. 그것을 받아 든 손이 잘게 떨렸다. 커다란 눈물방울들이 이제야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저는 그에게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던 건지, 더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확고한 증명이 제 손에 쥐어졌다. 목숨은 이제 단순한 촛불로는 비유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무겁고, 많은 이들의 사랑 안에 있는 것.


“저는, 오이카와 상. 덕분에 행복합니다, 행복해요. 정말.”
“…….”
“그 사람도,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만난다면, …….”


훌쩍거리는 통에 말이 자꾸만 끊겨 나갔다. 카게야마의 뜨거워진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덕분에 행복하다는 말은 고백 같았다. 거의 반쯤은 그렇다고 봐도 무방할지도 몰랐다. 울지 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떼어지질 않는다. 물을 먹은 그의 눈 안에 아득한 세계가 있다. 바다든 하늘이든 별이 흩뿌려진 우주든, 오래 바라보면 빨려 들어갈 것 같고, 깊게 생각하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게 되는.


“토비오.”


말을 꺼내기 위한 준비 단계는 시뮬레이션이었다. 너는 떠날까, 떠나지 않을까. 그래 헛된 희망보다야 고된 현실이 나을 듯싶었다. 결과가 무엇이든, 어떤 게 너를 유혹하든. 나를 봐. 부디 나만을 보고 있어.


“찾지 마.”
“……네?”


잠시 얼어붙은 분위기는 오이카와를 작게 타박하는 카게야마 덕분에 녹는 듯도 했었다. 장난치지 마세요. 변하지 않은 표정과 어투가 아니었다면 물 흐르듯 아무 날의 아무 시각 정도로 넘어갔을 테다.


“나카무라, 찾지 마.”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그새 붉게 물든 흰자위가 터질 것 같았다. 분위기는 급하게 냉각되었다. 분노가 컸던 건 그가 그가 모든 걸고 찾아다니던 사람이었던 게 첫 번째 이유였다. 카게야마는 순간 오이카와를 향한 오롯이 밉기만 한 감정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애초 어떤 조건으로 이곳에 머물렀던 건지는 그도 잘 아는 사실이다.


“……나가겠습니다.”
“……토비오.”
“더 얼굴 못 뵐 것 같습니다.”
“토비오.”


오이카와와 나카무라. 누가 더 우위 선상에 있는지 그는 확인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명백히 그어진 선은 어쩌면 지구의 자전처럼 당연하기만 했다. 예상은 했다만 이렇게 격렬한 반응일 줄은 몰랐다. —지친다. 상황을 그래프로 만든다면 내려가는 부분이 유독 험하고 길 것이다. 힘든 매일이야 눈 꾹 감고 견디면 된다, 불안한 부분은 하나였다. 대체 그 종착지는 언제쯤 제가 될 수 있는 건지. 바뀌긴 하는 건지. 아니 애초, 저였던 적은 있었는지.


“죽었어.”
“네?”
“네가 찾을 수 있는 게 없단 말이야.”
“…….”
“토비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해……? 네가 누굴 위해 살아왔는지 알아, 아는데……! 나는…….”


견딜 수 없게끔 초라해져.

상처 받은 얼굴. 참고 참았던 답답함은 하필 이런 순간에 터지고야 말았다. 온몸에 열이 가득해 어떻게든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혹시나 그가 잘못된 선택이라도 할까 겁이 났고, 그냥 그게 다였다. 그래서 불행을 느꼈다. 미안해, 잘못했어. 별 도움도 안 되는 말이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는다. 초점 없는 눈으로 서 있던 카게야마가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이카와 상, 잠깐만요. 생각을 정리하려 하지만 머리가 도통 그를 따라주지 않았다.

그제야 자료를 다시 헤집었다. 이상한 기시감의 정체는 이것이었다. 확실히 그의 말이 전부 맞았다. 머리에 웽웽 제정신이 아닌 벌떼가 기생하는 것 같았다. 손에 힘이 풀려서 자료들이 꽃비처럼 바닥을 날았다. 생명 활동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지만, 이건 예상의 범주에도 넣지 못한 거였다. 왜 당연히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의 부축을 받아 다시 침대에 앉자 다리 위로 눈물이 툭 툭 떨어졌다. 제 것이 없다. 이 잠옷도 앉은 침대도 전부. 대체 무엇이 잘못의 시작이었던가 눅눅한 바다 내가 났다. 쌓였던 걸 터뜨려버린 오이카와는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아마 그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슬퍼서 눈물이 줄줄 새면서도 그런 그를 향한 일말의 미안함이 버짐처럼 희게 피었다. 하필 버짐이다. 피어나는 흰 것이라면 다른 좋은 것들도 많은 텐데. 그래 차라리 당신이 내 눈물을 닦아 주는 게 낫다. 이렇게 있는 것보다야 차라리. 충격받은 눈은 카게야마의 것이다. 지쳐 잠든 것은 눈물자국이 아니었다면 밤에 물들어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었으리라.


“속상하십니까.”
“…….”
“……나가겠다고 해서 속상하셨습니까.”
“—그냥, 생각보다는…… 토비오 네 행동이 갑작스럽기도 했고……,”


괜히 얼버무렸다. 둘의 사이엔 사람 한 명쯤 더 끼일 공간이. 카게야마가 뜨겁게 부은 눈을 꿈뻑거린다. 담담히 벌어진 입술에서 잘그락 눈물 내가 났다.


“그냥 속상하다고 해주세요.”
“……왜?”


너는 나를 어느 나락으로까지 떨어뜨리고 싶은 거야? 오이카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카게야마의 남색 눈동자 가득 그런 그가 담겼다. 그가 눈을 뜨고 그것을 마주 봤더라면,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얇은 막에 싸인 액체 같았던 검푸른 감정들을.


“저 때문에 화내는 모습이 기뻤다면 믿으실 겁니까.”
“……응?”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는 인정하기로 했다. 화를 내고 슬프기만 해도 모자란 감정 사이에 오이카와를 향한 걱정과 기쁨이 껴들었다. 그는 다정했다. 장난기가 많지만 중요한 순간엔 아니었고, 강했다. 섬세하고 신중했다. 늘 바빴지만 그 와중에 제 사랑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했다. 카게야마가 이를 악물었다. 그건 전부 좋은 점들이긴 하나 그저 오이카와의 구성요소 몇 번째쯤을 차지하는 것들에 불과했다. 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센터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와의 감정선을 죽 훑으면 결론은 제법 쉽게 나왔다.

그를 마음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수면 아래 있었던 적은 있어도 메말랐던 적은 없었다. 그가 매일의 그에게 아주 조그만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말할지라도, 작은 것들이 모이고 모이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는.

결국 생각의 중심은 오이카와로 넘어오고 말았다.


“아, 잠깐만 토비오. 잠깐만.”


겁이 난다. 필사적으로 카게야마에게서 얼굴을 숨기려 애썼다.


“늘 제가 코앞까지 다가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오이카와 상은 없으시네요.”


따뜻한 손바닥이 강한 힘으로 팔을 잡아 내렸다.


“상관없습니다.”


오이카와가 애써 돌린 얼굴을 다시 당겼다. 손길은 우악스럽기 그지없다. 양손에 뺨을 쥐자 뜨끈뜨끈했다. 씻었다더니 삶아진 건가 의미 없는 생각은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눈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욕망, 도로 위에 냅다 부은 타르처럼 끈적하고 검고 냄새나는 것과 마주했다. 애정과 두려움과 사랑과 걱정과, 두 개의 감정이 가면을 바꿔 껴가며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가끔 생각이 너무 많아 겁쟁이가 되어 버린다.


“상관있었던 적,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날을 오늘이라고 부르지, 내일이라고 부르진 않으니까.

푹신. 오이카와가 뒤로 넘어갔다. 카게야마는 그 위로 올라타 그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섧게 갈라진 낮은 목소리가 걱정이었다. 홍차색 눈동자는 거의 휴색에 가까워 보였다. 아, 토비오, 너를 향한 내가 도무지 이기심이 아닌 게 없다. 맺힌 눈물이 아래로 툭 떨어져 오이카와의 속눈썹을 적셨다. 슬픔의 염도는 언뜻 그의 것과 비슷하게 그의 안구를 채웠다.


“울지 마.”
“…….”
“네가 안 울었으면 좋겠어. 그 사람 때문에.”
“…….”
“내 욕심으로는, 그냥 잊어버렸으면 좋겠어.”
“……딱 일주일 정도만 슬퍼하겠습니다. 그냥 그럴 테니까,”
“토비오 쨩.”


카게야마 토비오. 좋아해.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서, 더 큰 표현을 할 수 있단 걸 알아. 사랑해, 토비오. 내가 토비오를 사랑해. ……거절하지 마. ……사실은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좀 확신해도 될 것 같은데, 나.

그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라면, 죄를 짓자. 어떤 신도들이 우르르 몰려와 너희는 천당이든 천국이든 극락이든 갈 수 없다고 한다면, 가지 말자. 우리의 매일은 이미 너무 타락했고 사후를 생각하는 건 현재를 가진 자들이나 할 수 있는 행위이니. 우린 가진 게 없는 삶을 살았는데 이젠 서로의 얼마만큼은 좀 가져도 되지 않을까.


“누가…… 거절한다고 했습니까.”


처음 고백을 했던 날이 떠올랐다. 똑같은 고백과 똑같은 대답. 시간이 많이 흘러서 더는 어린애가 아닌 존재들의, 더 주춤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더 숨기는 건 없는 겁니다.”
“응.”
“약속하신 겁니다.”
“약속.”
“손가락 엮으세요.”


다른 게 엮이는 건?
아까 했던 말 물려도 됩니까.


퉁퉁 부은 얼굴을 다정하게 쓸어보는 흰 손. 여전히 숨기는 게 있을 수밖에 없는 마음이 고달팠다. 통째로 없애버리면 되지 않나 생각해본다. 작은 손가락 연극으로 시작했던 게 이제는 저까지 제 연극의 배우가 돼버린 기분이었다. 몸을 돌려 위를 차지한다. 불그스름한 얼굴이 눈알을 굴렸다. 몸에 힘을 빼고 그를 짓누르자 왁왁 성질을 냈다. 따뜻하고 서투르고 거칠어. 웅얼웅얼 이야기를 하자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 끝이 곤두섰다. 아 어떡해 이거. 물까? 가장 더러운 욕망을 감추고 이를 세웠다. 앙. 얼얼한 귀에 축축한 소리에, 다음날 카게야마는 일부러 붉히지 않아도 붉은 한쪽 귀를 엉거주춤 감추고 다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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