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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밤의 강에는 그림자가 지지 않는다 22


정오 글


***


아삭. 두 가지 빛깔 중에서 고민하다 연두색 포도를 집어 들었다. 비싼 거라던데, 망고 맛은 모르겠고 확실히 달착지근하기는 하다. 사각사각 포도를 씹으며 생각들을 어지러이 풀어놓았다. 요즘은 굳이 책을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앙에서 회의를 하고 온 뒤 며칠, 오이카와는 무슨 생각에선지 나무로 된 장식품 하나를 들고 들어섰다. 섬세하게 조각된 나팔꽃 모양의 물체 아래 조그만 기기 하나를 놓았다. 딸깍, 전원 버튼을 누르고 그의 귀에 꽂힌 인이어를 빼갔다. 오늘은 이거 듣지 마! 가끔 그런 날이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알겠노라 응수했다. 유난히 들떠 보이는 모습도 대수가 아니었다. 아, 아, 토비오 쨩 들려? 울림이 더해진 그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끝까지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건 나무로 만든 확성기였다. 전원 버튼이 있는 전자 기기는 인이어의 또 다른 버전 같은 거였고. 밤새 충전을 시켜 두고 나면 카게야마는 그것을 끌 일이 없었다. 잔잔한 음악을 틀어주는 라디오처럼, 그건 하루의 적막을 기분 좋게 메꿨다. 달리 가리는 것 없이 들려오는 오이카와의 또 다른 모습이 재밌었다. 그는 때로 능글맞기도 때론 가차 없기도 했다. 가끔 제게 의견을 구했으며, 재밌는 일은 일부러 얘기해주는 때가 많았다. 여전히 저를 놀리거나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그는 대개 손발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달콤했다. 기다란 보라색 포도 하나를 씹은 카게야마가 코를 찡긋한다. 달다. 달다를 넘어서서 덜큰했다. 오이카와가 포도 맛이 어땠냐고 물으면, 달았다고 답하겠다고 마음먹는다.


“토비오 쨩! 지금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은?”
“눈앞에 있습니다……?”
“응……?”


이런 답 원하시던 거 아니었습니까, 나왔어야 할 말이 타이밍을 놓쳤다. 오이카와는 당황하던 것도 잠시 붉게 물든 얼굴로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와 둥근 입 동굴이 그의 기분을 짐작케 했다. 카게야마가 오른손을 들어 아닌 척 슬쩍 뺨을 문대 보았다. 뜨끈하니 달아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역시나였다.

오늘 오이카와는 점심도 거르고 하루 종일 일에만 몰두했다. 아주 복잡하거나 특별하게 빠른 처리가 필요한 일도 없었는데 말이다. 물론 중간에 배가 고파져 사과 하나를 와삭거리긴 했지만, 그 와중에도 오른손엔 펜이 끼워져 있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시계를 확인했고 핸드폰에 몇 마디 글자들을 두드렸다. 화요일. 전원 버튼을 누르자 떠오른 날짜는 서류에 적힌 날짜보다 사흘이 일렀다. 금요일까지 완료할 서류를 지금 해결한 오이카와가 그제야 뻐끈한 눈을 감았다. 이제 연락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하던 게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지금 내가 뽀뽀하면 싫을까?”
“……(아까 말은) 오햅니다.”
“음.”


오이카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단정한 손끝이 턱을 괴고 담백한 눈빛이 카게야마를 응시했다. 생략, 생략, 생략! 카게야마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생략된 말이 문제였다고 말하기에 이미 제 혀는 상대에게 꼼짝없이 붙잡힌 뒤였다. 대체 왜 뽀뽀라는 말이 키스로 끝나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포도 맛. 맛있네?”
“안 드셔보셨습니까?”
“지금 드셔보셨잖아.”
“……변태 같습니다.”
“……좋네. 그거 사실로 치고 한 번 더 하자.”


읍. 막힌 입술을 딱히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엔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쥐었다. 텐도에게서 당당히 얻어 온 흉터가 얇은 천 사이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분명 저보다 낮은 체온을 가지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 뜨거웠다. 열이 있나?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그건 그냥 제 온도였고 달아오른 그의 온도였다.


오후일 것 같은데, 부르면 사장실로 좀 와.

정확히 오후 두 시, 하루 내도록 소리가 없던 조그만 확성기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저하다 누구를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복면을 손에 쥐었다. 그는 저번 같은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했다. 어차피 목격자는 남지 않겠지만, 오이카와가 그를 살려두길 바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생각과 달리 무심한 표정으로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열자 오이카와가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고 싶었지? 능글맞게 말하는 그는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입꼬리가 간지러워서 입안 살을 깨물었다. 오이카와의 웃음이 어딘가 서툴러 보였다. 그제야 카게야마 눈의 초점이 흐릿했던 배경으로 옮겨 갔다. 이미 익숙한 검은 나무 탁자와 그날 이후 새것으로 교체한 의자들과, ……. 초점은 오래된 카메라의 그것처럼 맞춰지는데 꽤 긴 시간을 요구했다. 비현실적인 장면에 머리는 마치 오류 난 컴퓨터처럼 버벅거리기만 했다.


“토비오.”


툭. 오이카와의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둥근 귓바퀴를 천천히 쓸며 그에게 가벼운 온기를 전했다. 검은 복면이 스르륵 풀렸다. 푸른 눈동자는 숨이 멎은 듯 한 방향만을 보고 있었다. 얼어붙었던 입술은 그제야 녹아 웅얼웅얼 단어를 만들어냈다.


“사…… 와무라 상.”


그 이름에 단정한 시선이 그를 향하고, 시원한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그가 살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가 살아 있다는 걸 그가 알게 돼도 괜찮을 줄은 몰랐다. 떨어져 있어서 잠시 잊고 살아야 했을 뿐, 한번 그를 마주하자 오래된 그리움이 와르르 쏟아졌다. 한 발짝, 헬륨 가스가 첨가된 풍선처럼 몽롱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걸림돌이라도 있는 것처럼 앞꿈치가 턱턱 막혔다. 그의 그 모습을 안쓰러이 쳐다보던 사와무라가 몸을 일으켰다. 오래전 잃어버렸다 생각했던 동료가 살아 있었다.


“……네…….”


보고 싶었지? 오이카와의 물음에 늦은 답을 내놓았다. 완전함은 나카무라만이 줄 수 있는 것이라 여기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건 불완전이었다. 우습게도 완전함이란 제게도 이렇게 많은 요건이 필요한 거였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왜 오이카와가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을 물었었는지. 움찔거리는 카게야마의 자세가 어색하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을 금세 눈치챈 사와무라가 먼저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푸른 눈이 물을 먹고 깜빡거렸다. 그 사이 카게야마는 그보다 조금 더 자라 있었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사와무라의 품이 주는 따스한 안정감은 어릴 때와 같다는 것을.


“너였을 줄 알았어.”
“……저는, …….”
“잘 있었어? 아픈 데는 없고?”


카게야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속 썩였으니 아프면 안 되지.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다정함이 그득했다. 앉아서 얘기하자. 그를 자리로 데려간 그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카게야마.”


그가 앞에 놓였던 파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안에 든 건 크게 인화된 사진 뭉치였다. 촤르륵 도박판의 주인처럼 사와무라가 종이를 탁자 위로 세 번 펼쳤다. 육십 명 정도의 인물들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 있어? 사와무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게야마가 사진 몇 개를 가리켰고, 그는 마치 기억이라도 하라는 듯 그가 짚은 사진들을 전부 뒤집었다. 그가 가리킨 사람은 넷. 매서운 눈빛이 사와무라의 손을 뚫을 듯 쳐다봤다.


“여기가 리더 역할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제가 죽을 줄 알았을 거고, 최소한 탈출을 예상하지 않았고, 거만함이 몸에 뱄습니다.”


카게야마가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이유를 꼽아 보였다. 그의 말을 듣던 오이카와는 그럴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사와무라도 공감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카게야마가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진을 뒤집어 나머지 사진들과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죽었습니다.”
“공식적인 활동은 힘들 거고.”


따라붙은 오이카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사와무라가 나머지 사진들을 두 개의 사진 위에 엎어 놓았다. 이놈들이 머리. 아주 대형은 아닌데 잘못 건드렸다가 난처해지기 딱 좋은 상대지. 그 말에 오이카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어떻게 없애야 좋을지, 상대의 거미줄같은 구조를 생각하며 인상을 굳혔다.


“죠젠지랑 다테는 어쩌다 찾아간 거야?”
“죠젠지는 저에 대한 흥미가 클 거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누군지 궁금해할 거고, 알게 된 뒤에도 저를 살려둘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어요.”


처음이라 꽤 공을 들였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은 데에는 그 이유가 가장 컸다. 바닥이란 바닥은 이 잡듯 뒤졌고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그 어떤 소문도 떠돌지 못하게 했다. 적어도 죠젠지와 만나기 전까지만은 그래야 했다. 그래서 스파이인 게 들통나 다 죽어가던 놈에게 수장의 인상착의를 들었을 때, 그는 그때까지 카게야마가 만났던 이들 중 유일하게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노랗게 탈색한 머리, 귀걸이,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증거. 그가 입을 놀릴 때마다 빛을 반사하던 혀의 피어싱.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혹시나 하는 희망에 그를 신이라도 된 듯 쳐다보던 남자는 그 ‘신’의 손에 목숨을 잃고야 말았다. 심장을 꿰뚫는 꽤나 힘든 방법으로, 시체가 발견되더라도 저라는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 카게야마. 그래서 진짜 이유가 뭐야?”


침착하고 당연한 물음에 카게야마가 속으로 작은 웃음을 뱉었다. 오래 호흡을 맞췄던 사이라는 게 무색하지 않았다.


“……죠젠지를 제외하고, 몰랐습니다.”


중앙 건물을 포함 개인 조직 건물들까지, 건물들은 전부 숨겨져 있었다. 위치를 알아내는 것부터가 카게야마에게는 고역이었다. 그가 겨우겨우 그것을 알아낸다 해도 건물의 주인이 어떤 조직인지를 알 수 없다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아오바죠사이, 시라토리자와, 다테, 죠젠지, 카라스노 전부 센터의 붕괴 이후 만들어진 이름이었다. 어느 게 어떤 조직인지 구분이 힘든 건 둘째치고 조직의 수장을 알아내기 어렵다는 게 카게야마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조직을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수장, 그를 알아내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수장에게 있는 특권들, 그의 성향에 따라 결정되는 조직의 방향 같은 건 카게야마에게는 목숨이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다테를 추천받았습니다.”


오이카와는 그제야 카게야마의 행적이 이해가 갔다. 저를 보고 적잖아 당황하던 모습은 다테 측에서 아오바죠사이에 관한 정보를 알리지 않아서였다. 후타쿠치인지 모니와인지는 몰라도 조만간 뭐라도 한 박스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오이카와가 발을 까딱거렸다.


“오이카와.”
“……아, 그래.”


오이카와는 뭘 보내면 들키지 않고 감사를 표할 수 있을지 시덥잖은 생각들을 하던 찰나였다. 타박하듯 그를 부르는 소리에 사와무라의 것과 같은 파일을 집어 들었다. 카게야마는 대수롭지 않게 파일을 건네받았다. 뭡니까? 이건. 아까랑 똑같아, 사진.


“열어봐.”


안에 든 건 뒤집힌 사진이었다. 보기 힘들게 전부 뒤집어놓은 사진에 카게야마의 얼굴에 물음이 떴다. 슬쩍 오이카와를 쳐다보자 그는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불빛 아래 파르스름한 손이 사진을 뒤집었다. 이내 숨도 쉬지 않고 사진을 넘겨 보았다. 마지막 사진을 다시 맨 뒤로 보내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동시에 심장이 아찔할 정도로 마구 뛰었다. 카라스노.

전부 살아 있다.


“만나고 싶지 않아?”
“…….”


오이카와의 음성이 저 너머로 흐릿해졌다. 배가 묵직하고 뜨거웠다. 급하게 아득 입안 살을 깨물어 피가 흘렀다. 손끝엔 피가 사라지고 알 수 없는 땀이 배어 나왔다.


“전부 다 아오바죠사이로 오기엔 무리가 있으니까, 일단은…….”


히나타, 타나카, 스가와라. 사와무라가 사진 세 개를 카게야마 눈앞에 드밀었다. 자랐지만, 그들을 못 알아볼 수 있을 리 없었다. 일렁거리는 눈동자 가득 사와무라의 얼굴이 담겼다.

오이카와가 팔짱을 낀 채 그런 카게야마를 응시한다. 다 죽을 것처럼 제게 와, 오직 하나의 버튼에만 살아나던 카게야마는 이제 없었다. 욕망은 그를 깨우고 점차 다채로워졌다. 그의 욕망 섞인 검은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아랫배가 당겨왔다. 욕망할 줄 아는 카게야마는 성수聖獸가 된 무언가 같았다. 세상의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길 바랐다. 그러나 그의 약한 부분만은 전부,


*


제 것이다.

출처가 무의미한 눈물이 사진 속 히나타의 머리로 툭 툭 떨어져 내렸다. 카게야마는 사와무라 앞에서는 끝까지 보이지 않던 것을 제게는 보이고 있었다. 정체 모를 희열을 느끼며 오이카와가 옆에 내려놓은 사진의 일그러진 부분을 살살 쓸어 원래대로 펴 놓았다. 카게야마가 한참 쥐고 있던 탓에 땀에 운 부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 것처럼 참고 있던 그의 눈물이 홍수처럼 터져 버렸다. 닦을 생각도 없이 떨어뜨리는 눈물에 오이카와가 히나타의 사진을 뺏는다. 대신 휴지 몇 장을 뽑아 카게야마의 눈물을 살살 찍어 냈다. 눈물에 번진다는 이유를 들어 사진은 전부 뒤돌려 놓았다. 실은 무너지는 그를 그들이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일인데.”
“그냥, ……모르겠어요.”
“더 울면 네 눈 진짜 아플 것 같은데 토비오 쨩. 퉁퉁 부어서 도루묵 눈.”


오이카와 상! 그렁그렁한 눈으로 와락 소리를 친 카게야마가 온통 붉었다. 그의 여러 감정들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오이카와가 휴지 두 장을 뽑아 그의 코 앞에 갖다 댄다. 흥 해. 하는 말에 별 거리낌 없이 흥 코를 풀었다. 씩씩 크게 숨을 쉬는 모습이 조금 진정된 듯싶었다.


“목마릅니다.”
“물 마실래?”
“복숭아 먹고 싶어요.”


음? 뜬금없는 말이 터져 나왔다. 부루퉁한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철이 아니네요.”
“……그러면 못 먹습니까?”
“오이카와 씨 능력이라면 충분하지. 맛은 좀 없겠지만.”


철은 언제입니까? 무심하게 묻는 말에 오이카와가 피식 웃으며 널브러진 휴지들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여름. 고개를 돌리고 있는 통에 카게야마는 그가 무슨 표정으로 입을 열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여름이라는 단어 사이가 거칠거칠했다.


“감사드립니다.”
“뭘?”
“오해도 풀고, 사와무라 상도 만났고, 또 다른 사람들도 만나게 될 거라고 하시니까요.”
“그러면……”


네가 하고 싶었던 걸 전부 하게 된다면, 너는 나를 떠날 거야? 애잔한 눈동자는 수명이 다 된 전구처럼 파르르 떨렸다. ……아, 방금, 까먹었다. 하고 싶었던 말은 전력 질주 후 입에 집어넣은 고구마처럼 뻑뻑했다. 괜한 눈물이 날 것 같아 애써 말을 돌렸다. 복숭아는 해를 잔뜩 받아야 알이 꽉꽉 여문다고 했다. 우리는 해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너만큼은 밤에도 해를 받나 싶을 정도의 복숭아처럼 향긋하고 달착지근하다. 실상 얼마나 썩어 버렸든, 내가 마신 것이 고여서 썩어버린 물이라고 하든. 너는 맛있는 복숭아를 먹어본 적 있을까? 센터를 나와서 어두운 도박장을 전전할 때 처음 먹은 복숭아는 통조림이었다. 투명한 유리그릇 안 먹다 남긴 복숭아가 노랗게 반들거렸었다. 네가 지금까지 맛본 복숭아도 그랬을까?

향긋해. 입 주변이 물들도록 베어 물면 아, 향긋하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싶었다.


“천 개든 만 개든 전부 사줄게.”


그러니까 내년 여름에도 나와 있자.

……우리가 내년 여름을 기약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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