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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밤의 강에는 그림자가 지지 않는다 16
정오 글
***
카게야마의 검은 옷에서는 묘한 푸른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그의 움직임은 빠르고도 군더더기 없었다. 그가 동작을 가지고 조그만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장내의 모든 숨이 한 번씩 멎었다. 그는 잠깐의 열 발자국으로 상대의 공격 패턴을 전부 파악한 것이었다. 그에게 안광이 있다면 아주 검푸른 빛깔일 것이리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덩치가 있는 몸은 아닌데, 움직임에 느껴지는 위압감이 상대를 겁에 질리게 만든다. 한 명이 더 쓰러졌다. 남은 건 A 두 명과 E 하나. 그가 자세를 다잡는 순간 불이 다시 한번 크게 밝혀졌다. 눈부심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불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밝은 곳에 눈이 익숙해지려 할 무렵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다시 꺼졌다. 앞이 잠깐 흐릿해지겠지만 관계없었다. 어차피 지금부터 그들이 놀라야 할 것은 천장에서 떨어질 푸른 불꽃뿐이었으므로.
“미치겠네.”
“너 이렇게 변태같은 새끼였냐.”
마츠카와의 감탄사와 함께 이와이즈미가 경악한 표정으로 오이카와를 쳐다봤다. 천장에서 공격이 쏟아질 거란 말은 들었지만 그게 카게야마만을 공격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가벼운 대련쯤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에겐 그런 의미가 아니었나 보다. 처음으로 밖을 향해 구른 푸른 눈동자가 홍차색 눈동자와 부딪쳤다. 다 부숴. 공격 장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오이카와의 입 모양이 그렇게 말했다. 피식. 보진 않았지만 분명 카게야마의 입꼬리도 올라갔을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검푸른 칼이 박혀버린 공격 장치 하나를 보며 오이카와가 미소를 지었다.
“새삼……”
천재는 천재구나. 아마도 모두의 입에서 한 번쯤 나왔을 말이었다. 카게야마의 왼손이 다시 칼을 날렸다. 두 번째 장치는 아예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함성이 강당을 울렸다. 시선을 끌지도 않았던 오른손에 A 한 명이 땅으로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센스와 그를 받치는 재능에 오이카와의 몸이 가볍게 전율했다.
“데리고 나가.”
쓰러져 있던 사람 세 명이 강당 밖으로 이송됐다.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힌 건 아니었기에 상처는 금방 회복될 테였다. 다만 카게야마의 신경에 거슬렸던 건 쓰러진 세 명을 옮기러 네 명이 투입되었다는 것. 눈으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오이카와가 이렇게까지 그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는데 굳이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 시작할 때만큼의 체력은 아니었지만 약간 귀찮아질 만한 여유는 있었다. 지금까지 암묵적인 동그란 원 하나를 정해두고 그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젠 그것을 깰 때가 온 것 같았다. 왼발을 굴려 마음속의 빗금을 슬슬 문질렀다. 잠깐 굼떠졌나 싶었던 날쌘 몸이 방향을 돌려 뒤쪽으로 튀어나갔다. 강당의 끝까지 달려나가 다시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을 때야 이곳의 모든 존재는 그가 그린 것이 포물선임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제 원은 제가 망가뜨렸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카게야마의 발에서 상대가 밟아온 원이 무너졌다. 그가 그 곁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카게야마와 상대 E 한 명이 다였다.
“우, 우와아아……!”
채 1분도 안 돼 일어난 일이었다. 귀로 들어오는 먹먹한 함성이 싫지 않았다. 조금 쉽게 가려고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보여줄 건 전부 보여주고 가고 싶었다. 저 하나로 인해 아오바죠사이의 위상은 더 드높아질 것이다. 그와의 친분이 그에게 독이 될 리 없다.
더 견고해지기를, 더 강인해지기를, 모두가 고개를 숙이기를.
카게야마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긴 앞머리 때문에 코 위로 떨어지는 땀이 신경을 긁었다. 손을 들어 거칠게 뒤로 쓸어 넘겼다. 앞으로는 약간의 거슬리는 것들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갈 곳을 잃고 바닥으로 쏘아지던 공격은 오이카와의 손짓 한 번에 멎었다. 그라면 지금부터 제가 뭘 할 생각인지 알지도 몰랐다. 늘 제 생각을 한 단계 위에서 꿰뚫는 것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카게야마가 왼손을 바닥에 대고 눈을 즈려 감았다. 상대는 당황한 것 같았다. 공격이 잠시 멎었다. 카게야마는 그 틈을 타 재빨리 상대에게 온 정신을 집중했다. 팀의 목줄을 쥐고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듯 확실히 그의 정신은 강했다. 그러나,
“……제가 더 강합니다.”
누구한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암시처럼 중얼거렸다. 어차피 오늘은 치명상의 공격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를 잠깐 기절시킬 만한 공격 빼고는 큰 상처가 될 리 없었다. 카게야마는 최소한의 방어조차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신경은 오직 상대를 향해 뻗어 있었다. 그가 강하게 저항하는 게 느껴졌다. 집중력이 대단했다. 괜히 아오바죠사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후에 한 것이었다. 카게야마를 향해 세 번쯤 공격을 던지던 상대가 급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 토비오?
아. 잊으면 안 되는 목소리였다.
아……. 카게야마가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방심했다. 상대가 공격을 잘못 사용할 줄은 몰랐다. 볼이 화끈거렸다. 턱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것에 잠깐 놓쳤던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다시 그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큰 숨을 내뱉자 폐가 텅 빈 기분이었다. 일어나서 끝났다고 얘기해. 억지로 밀어 넣은 명령에 볼의 상처가 더 쓰라려 왔다. 상대는 최선을 다하는 건지 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건지 허망한 몇 번의 손질을 했다. 순간 쓴 미소가 카게야마의 입가를 감돌다 사라졌다.
“졌습니다. 끝났습니다.”
상대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카게야마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위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곧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푸른 눈동자를 드러냈다. 순간 마주친 불빛과 맞물려 세상 어떤 보석보다 찬란히 부서졌다.
“아.”
허망한 몇 번의 손질이 한 번쯤은 허망하지 않았나 보다. 오른쪽 볼이 따끔거렸다. 아차 하는 사이 복면의 끈이 끊겨 땅으로 나풀나풀 떨어졌다. 그가 그것을 알아챈 순간과 거의 동시에, 그의 형체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던 남은 불빛마저 전부 사라졌다. 딸깍. 버튼 누르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갑작스런 소등에 당황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올 즈음, 머리 위로 작은 기척 하나가 느껴졌다. 카게야마가 한 치의 헤맴도 없이 떨어진 그의 복면을 주워 올렸다. 끈이 짧아져서 다시 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는 이미 두 번째 복면의 끈이 죄 지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머리 위로 나비처럼 날아들던 검은 복면, 이 복면이 누구의 것인지는. 코의 안으로 이전의 쾌쾌한 땀내 대신 향긋한 섬유 유연제 냄새가 스며들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카게야마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 걱정이 됐으면 불 한 번만 꺼도 제가 알아서 해결했을 텐데, 고개를 들면 마치 이 먼 거리에서 그와 눈이 마주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꾸준히 너만을 보고 있었다는 것처럼, 나비처럼 복면을 날려 보내며, 꼭 달큰한 연서처럼.
“…….”
귀가 먹먹했다. 함성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제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주저하던 발이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모든 것이 제 손에서 이루어졌다. 오이카와는 애초부터 모든 영광을 제게 준 참이었다. 왜 눈물이 날 것 같은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카게야마의 뺨이 일그러졌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가 떠올랐다. 안다. 잊히고 있지 않다면 굳이 상기시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마음이 억울하도록 벅찼다.
“따라와.”
“어디 가는 겁니까?”
“옥상 정원. 내 공간이야.”
열쇠를 짤랑짤랑 흔드는 오이카와를 따라 계단을 걸어 올랐다. 여전히 상기된 뺨이 약간 붉었다. 문 몇 개를 지나는 방법은 오직 열쇠를 열쇠 구멍에 밀어 넣는 것뿐이었다. 구식이네요, 투덜거렸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암 다물려만 있던 입이 벌어진 건 마지막 문을 열고 난 뒤였다. 울창한 나무들과 작은 길, 누가 보면 숲에 들어왔다고 생각할 만한 모습이었다. 급할 건 없으니. 오이카와의 발걸음이 느려지고 카게야마가 주위를 둘러보던 시간이 지나자, 벽 난간과 경치가 눈앞에 가득하다. 예쁘지?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카게야마의 눈이 반짝거렸다. 하늘과 색이 같아, 무엇이 하늘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오늘이 사실은 식일이야.”
“무슨?”
“따지자면 뭐 독립 기념일?”
오이카와가 킥킥거렸다. 내가 너를 여기로 데려온 것도, 다른 조직 이름을 부른 것도 그래서 가능했어. 거긴 멀어서 어차피 잘 모를 거거든. 음…… 여기는 다섯 조직마다 다 식일이 따로 있어. 우리가 같은 날에 방화하긴 했는데-여기서 오이카와는 두 번 정도 웃음을 터뜨렸다, 방화라니, 범죄자 같잖아.- 같은 날에 그걸 기념하면 나 잡아 드세요, 하는 거잖아? 그래서 나눴어. 그리고 매번 한 조직이 식일을 기념할 때마다 다른 조직들에서 조금씩 인원을 추렴해 거기로 보내는 거지. 일종의 경비야 경비. 하지만 나는 이번에, 음, 만취하면 안 돼서.
“재미없지……?”
신나게 떠들다가 그제야 슬쩍 카게야마의 눈치를 본다.
“왜 만취하면 안 되는 겁니까? 오이카와 상이 이곳의 수장이라서?”
“아냐 아냐. 돌아가면서 해.”
“이번이 오이카와 상 차례였나 보네요.”
“음, 그것도 아닌데…….”
그냥 너랑 여기서 이럴 명분이 생기잖아. 그래서 내가 한다고 했어.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유하게 풀어졌다. 이런 그의 끈덕진 눈길을 견디기 힘들어졌다.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화려한 시가지가 눈에 띄었다. 아마 일반인들의 시야라면 보이지 않았을 만한 거리에 있을 것이다. 그곳을 향한 부러움으로 인한 씁쓸한 감정도 한때였을 뿐이다. 벽 난간 위에 손을 올려 보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
“저를 위했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
차라리 저를 처음처럼 평생 싫어하시지 왜 좋아한다고 말 하셨습니까. 악에 받친 말들은 응어리였다. 말이라도 해줬으면, 기다렸을 텐데.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당신에게 말을 걸 때마다 나를 피하는 당신의 모습에 내 마음이 어땠을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까? 나는 당신이 고작 그 정도의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었습니까? ‘내 탓인가보다, 내가 질렸나 보다.’ 이걸 인정하라고요? 당신은 당장 어제까지도 나를 싫어하는 어떠한 기미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왜 내가 잠이 들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습니까? 내가 괜히 울어서는, 괜히 당신을 지켜주겠다고 되도 않는 호언장담을 해서는, 하며 매일 밤 자책해야만 했나요? 왜 당신의 평소와 똑같은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마음이 시려서, 울고 싶어져야만 했습니까, 왜…… 왜……?
“미안해. 내가 전부 미안해…… 내가 너를 잃기가 싫었어. 너를 잃기가 싫어서, 내가……,”
“……잃어버렸지 않습니까, 결국.”
한참의 침묵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말의 공백은 누구도 본 리듬을 되찾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미 끝났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더 오이카와 상에게 드릴 마음도 감정도 없어요.”
착잡한 표정이 아닌 척해봐도 상처받았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의 턱이 파르르 떨렸다. 이후 한참을 달싹거리기만 하던 입술엔 얕은 잇자국이 남았다. 쓸쓸한 눈동자는 계절과 달리 곧 홍차색으로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순간 들이닥친 아릿함에 카게야마의 미간이 짧게 주름졌다.
“……한 잔, 할래?”
“네.”
오이카와가 물방울이 맺힌 리큐르 병을 어색하게 들어 올렸다. 카게야마로부터 긍정의 대답을 받고서야 입꼬리로 어설픈 미소가 피어났다. 기다리고 있으란 말과 함께 오이카와가 그의 곁에서 잠깐 떨어졌다. 카게야마가 벽 난간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어디선가 불어온 서늘한 바람에 땀이 식었다.
초봄에 그를 만났으니 이곳에서 벌써 세 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복숭아 맛.”
둥근 와인잔 안 옅은 분홍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시선이 마주치고 잔이 부딪쳤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켰다. 카게야마가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눈꺼풀이 뜨뜻해지고 기분이 들뜨는 걸 보니 단맛이 강하대도 술은 술인가 싶었다. 더 마실래? 묻는 말에 대답 없이 빈 잔을 내밀었다.
“어린 마음에, 배우지 못한 마음에……, 네가 내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여전히 널 사랑하니까 너도 그럴 거라고 그렇게. 근데 아니더라. 나는 그냥 네 곁을 떠난 거고, 네 곁은 다른 사람이 차지해도 아무 상관 없는 그런 사이가 돼 버린 거지. ……멍청하게.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걸 보면서, 나만 볼 수 있었던 네 표정이 이제 누구의 전유물이 된 건지 알게 됐어.”
“……안 들켰다고 생각했는데요.”
“안 들켰지. 토비오 쨩은 본인 일이라면 치밀하기 그지없잖아? 그냥 내 눈에만 보였던 거지, 내가 너를……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한 잔 더 하실래요?”
어느샌가 오이카와의 손에 있었던 병이 카게야마의 손에 가 있었다. 그의 그 서툴게 물어오는 모습이 좋아서 문득 오이카와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카게야마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그게 다였다. 눅진한 그의 눈동자가 웃음에 설게 가려졌다. 그는 근사하다. 풀어진 모습마저도 근사하다. 그를 적으로써 대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권위를 잃을 수 없는 자리에 함께인 사람들이라면 짐작하지도 못할 근사함이다. 취하면 안 된다니까. 손사래를 치는 모습이 어릴 적 기억을 더듬은 것처럼 흐릿했다. 꼭 무언가 잔뜩 미화된 모습처럼, 말이다.
“후회는 안 해. 일단 너는 그 이후로 죽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살아있는 모습도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일단 네가 여기 살아 있잖아? 네가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토비오 쨩. 만약 그때로 되돌아갈 수 있대도 나는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내 눈으로 맞이한 결과가 대체 얼마나 달라졌을지는 몰라도 일단 네가 잘못된…… 결말은 아니니까.”
좀…… 더 마음에 안 들지, 나? 이런 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실은 겁이 너무 나서……. 망설임이 진득이 묻어나오는 말이었다. 카게야마의 감정을 확신하곤 땅으로 향하던 고개가 부드럽게 다시 올라왔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 닿은 줄도 모르게 볼을 스쳤다. 그가 왼손을 들어 볼을 더듬었다. 그곳엔 커다란 재생용 밴드가 붙어 있었다. 정말, 오이카와 상은-! 짜증과 화가 뒤범벅된 음성이 희미해졌다.
“흔들립니다.”
홍차색 눈이 번뜩 빛을 뿌리고 간 것 같기도 했다.
“……흔들려요.”
그의 눈동자가 당당히 오이카와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애같이, 이게 꿈인지 아닌지를 몇 번쯤 고민해야만 했다. 실제로 잘게 경련한 입꼬리나 귀까지 물든 불그스름한 빛깔을 보지 못했다면 거기서 몇 번이 더 추가됐을지도 몰랐다.
“응, 토비오.”
네가 지금까지 살아야 했던 이유, 네가 이곳까지 제 발로 찾아와야 했던 이유. 네 생을 걸고, 네 과거에 흠집을 내며, 내게 흔들려준 거라면. 너의 두려움이 커지고, 겁에 삼켜지며, 또 한 번 내게 흔들려준 거라면.
“기분이…… 이상합니다.”
“……오이카와 씨도.”
카게야마가 난간에 팔을 괴고서 오이카와를 지그시 바라봤다. 피식 흘리는 웃음은 여전히 근사하지만, 그가 근사하지 않더라도 저는 그에게 흔들리고 말았을 것이다. 근사한 얼굴이 눈앞에 가득 찼다. 바람 분다, 추워? 카게야마와 똑같이 난간에 팔을 괸 그가 다정히 속삭였다. 상투적인 표현이었지만, 밤을 받아 어두워진 홍차색 눈동자가 꿀처럼 달콤했다. 핥으면 방금 마신 리큐르 맛이 날 것만 같았다. 오이카와가 마신 석 잔을 제외하고는 전부 제가 먹어서 그런지 온몸이 뜨끈뜨끈 달았다. 그나마도 서로 마신 석 잔에 토닉 워터와 스프라이트가 동이 났으니, 더욱.
“키스할래?”
응. 대답보다 조급한 눈꺼풀이 닫히고, 늦은 대답은 그의 입안에서 메아리가 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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