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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밤의 강에는 그림자가 지지 않는다 9
정오 글
***
끈질기다.
와인빛 수트에 앉은 먼지를 입바람으로 불어낸 오이카와는 따분한 표정이었다. 눈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도 쉬이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하필이면 오늘. 약도 먹을 수 없는데. 지끈지끈 울리는 머리는 그가 며칠째 얼마나 고되게 일을 처리하고 있는가에 대한 작은 반증이었다.
“마지막으로 왔던 곳이 여기라고 해서요.”
“내가 왜 여즉 그쪽을 안 죽이고 살려 두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말의 요지와는 어긋난 질문을 던졌다. 매일 관리할 게 분명한 남자의 몸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오이카와가 피식 웃으며 눈 앞에 있는, 자기瓷器로 된 잔을 남자에게로 밀었다. 마시고 진정하라는 의미였다. 은은한 녹빛이 자기 안에서 작게 회오리쳤다. 좀 더 살살 다가가야 하는데 곤두선 신경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웃고 앉아는 있지만, 사실 남자란 그에게 있어 언젠가 죽여버려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보란 듯이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독이라도 들었을까 봐요? 그는 어떤 행동이 더 효과적으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사실은 잊기가 더 힘들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상대 같은 이들에게서 목숨을 담보로 체득한 것들이었으므로.
“어릴 때 도미노 같은 거 해보셨겠죠?”
가죽 꽂이에 꽂힌 볼펜 몇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세로로 세운다. 건넨 잔에는 여전히 손도 대지 않은 남자가 눈만 움직여 그것을 쳐다봤다. 다섯 개 정도가 같은 간격을 두고 서자 오이카와는 기다렸다는 듯 첫 번째 볼펜을 밀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연달아 볼펜들이 쓰러졌다. 남자는 불쾌한 표정이었다. 싱긋 웃음지은 오이카와가 다시 다리를 꼬고 앉았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쪽을 죽이면 내가 연달아, 우와. 얼마나 많은 놈들을 죽여야 고 입을 막을 수 있게요?”
“……사장님.”
“다음 대에 가장 유력한 총리 후보라고 들었습니다만.”
그가 이끌고 온 수족들의 팔에 긴장이 감돌았다. 아오바죠사이 건물 내에서 외부인의 무기 소지는 분명 금지됐을 텐데요. 속삭이자 남자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이쯤 하고 내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이카와는 지금 피곤하고, 그는 아직 죽일 수 없는 존재였다.
“사장님. 제가 약을 좀 먹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꿍꿍이가 있을지도 몰랐지만 가능한 상황의 경우의 수는 오이카와가 막기에 빠듯할 만한 위험을 나타내진 않는다. 남자가 고혈압이 있다는 정보를 잠깐 떠올린 그가 느긋하게 팔짱을 꼈다. 그래. 아직은 좀 더 살아야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그를 쳐다봤다. 남자는 안쪽 주머니를 뒤지더니 약 두 포를 꺼냈다. 좀 괜찮나 싶더니만, 쌓여 있던 피로가 눈으로 가장 먼저 몰려왔다.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오이카와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에게 총은 없었고 칼 정도야 금방 제압이 가능하다. 그다지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
……그런데 왜,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눈을 돌리는 순간 남자가 들고 있던 약 한 포를 공중에 흩뿌렸다. 실수다. 꼬리가 길어지겠지만 안 되겠다.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버려야지 마음먹은 오이카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순간 당연한 의문이 머리를 강타한다.
나머지 한 포는?
얼마나 곱게 빻았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루들이 탁자 위에 낭자하다. 인상을 썼다. 무얼 얼마나 마신 건지 생각하며 응급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온몸이 불타는 듯 뜨거워졌다. 목이 턱 막혔다. 어디선가 경험했던 기분 나쁜 열기가 그를 덮쳤다. 눈 앞의 남자와 그의 수하들이 평소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였다. 아 이거……
“얌체 새끼들이…….”
분노로 그의 윗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동자는 흐를 것처럼 번쩍이는 핏빛이었다. 센터가 오버랩되고 있었다. 물컵이 보이고, 벽이 보이고, 피투성이가 된 그의 왼손바닥이 보인다. 남자가 뿌린 것은 그때 그의 능력을 늘린답시고 주입받은 약물이었다. 영양제. 그들은 그걸 그렇게 말했다. 오이카와를 죽음까지 몰아넣을 수 있을 만큼 남용된 약은 당연히 미세한 양에도 쉽게 그를 압박할 수 있었다. 눈꺼풀이 감긴다. 눈 앞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몸 전체는 불덩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쩌지. 어쩌지. 판단이 흐려지려는데 귀로 찢어질 듯한 경보음이 울렸다. 그는 응급 버튼을 누른 기억이 없으니 누군가 그의 위험을 알아챈 것이다. 버텨야 한다. 혀를 깨물었다. 그러나 칼을 쥐고 다가오는 남자들에게 능력을 쏘아 보내는 것조차 벅차다. 발끝이 비틀거렸다. 턱, 벽에 손을 짚은 순간, 견고한 사장실의 문이 박살 났다.
“막아!”
뿌연 시야로도 날쌔게 움직이는 존재가 쉬이 구분이 갔다. 흐를 것 같은 눈물을 꿀꺽 삼켰다. 한 번 봐도 차마 잊을 수 없을 천재적인 몸놀림. 심지어 그건 그가 몇 번이고 봤던 움직임이었다. 그의 손에서 검푸른 물체가 날아가고 와장창 창문이 깨졌다. 신선한 공기가 안으로 들이닥치자 그제야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펑. 펑. 그는 마치 폭죽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로 달려들던 남자들은 오래된 풍선처럼 통째로 터져 버렸다: 그래 우리는, 도미노를 해본 적이 없었다.
갈증이 난다. 뭐라도, 뭐라도 괜찮았다. 혀뿌리가 타들어갈 것 같았다. 헉헉거리며 가슴을 쥐자 그들을 막아대며 남자가 오이카와의 쪽으로 다가선다. 그는 그들을 확실하게 제압하지 못할 만큼 급해 보였다. 살랑, 바람이 불고 익숙한 향이 코 주위를 맴돌았다.
“입 벌려 보세요.”
“……토비오……쨩……. 여기, 왜…….”
입 안으로 부드러운 뭔가가 들어왔다. 간절하던 습기로 가득한 스펀지였다. 산소라도 된 것처럼 물기를 빨자 차가운 손가락이 입 안에서 스펀지를 앗아 갔다. 바로 뒤이어 조금 더 축축한 스펀지가 입 안에 들어온다. 갈증과 열은 매우 느리게 가라앉고 있었다. 지친 몸이 피곤했다. 가까이 온 얼굴에서 그는 끔찍한 감정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몸은 더 견뎌 줄 생각이 없었다. 드디어 제대로 흘러 들어오는 시원한 물을 삼키며 오이카와의 시야는 팍, 암전됐다.
“몇 놈은 죽고 몇 놈은 살았습니다.”
“어…… 진심으로 고맙다. 카게야마.”
눈을 떴을 때 카게야마는 이와이즈미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머쓱한 듯 진심이 담긴 고마움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긴장에 딱딱해졌던 몸 위로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따스함이 발끝으로 퍼지고 그는 양 팔을 뻗어 카게야마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오이카와 상? 오이카와 상!” 눈을 마주치려 숙인 고개에 폭포처럼 머리가 쏟아진다.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아 네. 아까 잠깐 깨셨는데 다시 잠드셨습니다.”
“깨서 정신 차리면 잠깐 보자고 해줘.”
두 번쯤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 이곳은 편안하고 안락했고 안전했다. 억지로 현실로 돌아왔던 정신이 사그락 책장을 넘기는 소리에 마음을 놓는다. 시야는 까매졌지만 코로는 그의 잔잔한 살냄새가 흘러들었다. 잠깐씩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카게야마가 곁에 있다는 게 정말이지 꿈같았다. 악몽을 꿀 새도 없었다. 무의식 중에서도 그는 혼자가 아님을 자각하고 있었다. 톡.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깨어났을 때 그는 책을 손에서 놓친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달큰한 잠내가 미미하게 풍겼다.
토비오, 걱정하고 있니? 그럼 난 다음번엔 반드시 깨어날 텐데.
“오이카와 상. 정신이 드십니까?”
“응.”
“자요.”
건네준 물컵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제 큰 갈증은 없었으나 바닥까지 물을 싹 비웠다. 카게야마는 빈 컵을 팔만 뻗어 콘솔 위에 얹어 두었다.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바깥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다 진 해가 구름을 불태우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허리를 당기며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카게야마는 움찔거렸지만 그를 밀어내진 않는다.
“매일 이랬으면 좋겠다.”
“…….”
“나 걱정했어?”
울컥 콧잔등을 주름잡던 카게야마가 얄팍한 한숨을 내쉬었다. 꼈던 인이어에서 그라고 하기에 조금 늘어지던 말투가 들려오자마자 귀로 온 감각을 집중했다. 그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상대라고 했다. 상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기에 더 예민하게 상황을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 오이카와가 알아서 잘 해결할 거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어딘가 찜찜했다. 어쩌면 그가 그를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뭐든 최악을 대비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나 만일의 가정조차 허용할 수 없는 때에는. 아오바죠사이에 처음 도착했을 때 꺼내 뒀던 복면을 쓰고 끈을 단단히 조였다. 고민 아닌 고민을 하며 문 앞을 서성이던 중, 약봉지가 부스럭대는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약을 먹겠다던 남자는 약봉지를 공기 중에 털었다. 오이카와는 불행하게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그가 만들어낸 바람에 잔뜩 휘날렸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제발 제가 도착할 때까지만 무사하기를. 바라는 건 그것뿐이었다. 왼손으로 칼을 형상화하는 손이 창백히 질려 있었다.
만일 그가 인이어를 끼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오바죠사이에 오지 않았더라면? 아찔한 생각들이 오이카와가 기절해 있던 내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오이카와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카게야마가 입 안쪽 살을 꾹 깨물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약기운은 그가 그에게 가까이 가기만 해도 열기가 느껴지게 만들었다. 왜요? 죽을 뻔했는데 왜 이 상황에서도 되지도 않는 얘기를 합니까? 하고 싶은 말을 눌러 참았다. 대답은 뻔하다. 화가 나서 엉엉 울고 싶어 졌다.
“오이카와 상 저는,”
“이상한 감정으로 몰고 가지 않을게. 그러니까 그냥…… 그냥, 토비오.”
“네.”
걱정했습니다. 언젠가 그를 담뿍 걱정하던 작은 카게야마가 그와 겹쳐졌다. 카게야마는 그때처럼 숨을 쉬지 못하지도 울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걱정했다는 말을 내놓을 뿐이었다. 그가 이기심으로 작은 아이에게서 빼앗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미안. 미안해. 건조한 입술이 달싹거렸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혼자였다고 해도 어떻게든 그 상황을 해결할 순 있었겠지만 부상의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몸의 상태도 지금처럼 빨리 호전될 리 없었을 테고. 카게야마의 발 빠른 대처가 없었더라면 아오바죠사이는 최악의 비상 상태를 맞았을 게 뻔했다. 또다시 카게야마에게 빚을 지고 만다.
“마츠카와 상이 깨어나면 잠깐 뵙자고 하셨습니다.”
“아직 안 깼어.”
“……? 지금 깨시지 않으셨습니까.”
“잠꼬대야.”
음…… 아주 급한 건 아니니까. 오이카와가 징징거리면 그냥 뒤로 미뤄줘. 나가려던 마츠카와는 다시 고개를 들이밀고 카게야마에게 부탁을 건넸었다. 그로선 지킬 이유가 하등 없는 부탁이었다. 오이카와를 한 번 문을 한 번 쳐다보던 카게야마가 이내 방의 불을 끄고 작은 스탠드를 켜 놓는다. 암막이 낀 듯 텁텁하게 빛을 잃어가던 붉은 눈동자에 그는 차마 등을 돌릴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카게야마를 구한 데 대한 대가로 많은 위험과 반대를 무릅써야만 했다. 그가 왜 여즉 그를 사랑하는지, 왜 이렇게까지 애를 쓰고 있는지 카게야마는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작은 행복 하나는 이뤄 줘도 괜찮지 않을까.
“주무세요.”
“응.”
그새 밤이 되었다. 천장은 밤의 색으로 어둡게 물들었다. 낮의 일이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카게야마가 난감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의 주인은 아직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이카와 상. 주무셔야 합니다.”
“토비오 쨩.”
“네?”
“토비오.”
“……?”
“토비오야.”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듯 카게야마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고개를 돌리면 그새 조금 수척해진 얼굴이 코앞에 있다. 그 속엔 그가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의 공백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그를 만났더라면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었을지도 모르겠다. 꼭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오이카와의 홍차색 눈동자가 어둠에 잠겨 검은 빛깔을 머금었다. 강당 안에서 밤마다 만나곤 했던 색이었다. 너무 사랑해서 그것이 태양이라고 해도 온몸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색깔. 온몸이 불살라진다고 해도 그의 행복을 염원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빛깔. 마주치면 머리가 어지러워 입이 마음대로 말을 뱉어내게 하던 아름다운 따스함. 여전히 오이카와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슴을 찌르는 감정이 서럽다. 속눈썹에 휩싸인 눈이 벌꿀처럼 촉촉했다. 그때보다 더 그득해진 사랑을 담고 그의 얼굴 위로 뚝뚝 떨어졌다. 달콤해야 할 액체는 씁쓸하다. 씁쓸함이란 카게야마의 감정에서 기인한 것일 뿐 실상은 다디달기 그지없겠지. 이미 맛보았던 것이라 더 아득하다.
“미안해. 널 놓고 싶지가 않아져서 자꾸……. 자꾸 내가 우리 관계를 되돌릴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꿔서, ……. 미안해. 전부 미안해.”
“이제 그만……. 흔들지 마세요, 오이카와 상.”
오이카와는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웃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불속의 두 몸이 멍하니 유영한다. 그가 제게서 도망칠까 봐 손을 뻗을 수 없는 남자와, 이미 그를 지운 탓에 그의 뺨을 쓰다듬을 수 없는 남자의 몸이.
“흔들면…… 흔들려 줄 거야?”
“—아.”
“됐어. 토비오 쨩. 무리해서 나한테 맞춰줄 필요 없어. 어차피 너는……”
심장을 누가 깔고 앉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어차피 너는, 같은 말 따위 꺼내지 말 걸. 오이카와가 마음 같지 않은 상황에 입술을 깨물었다. 인정하기 싫은 사실을 직시하는 건 오늘도 힘이 든다. 이제 거의 오래 묵은 레드 와인 빛깔이 된 눈을 밤바다 빛깔의 눈이 먹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지대한 사랑이 너무 크다. 내가 줄 수 없는 마음인 걸 알면서도, 아직도 퍼 줄 게 남은 걸까. 이용의 목적으로 이곳에 남았다. 그런데 당신은 왜 이렇게 처절하고 안타깝고 마음 쓰린 표정으로 나를 붙잡고 있어. 연민이 부슬부슬 그의 마음을 적셨다.
“……괜찮습니다. 뒷부분은 못 들은 말로 치면 됩니다.”
“…….”
사랑하지 마세요. 사랑하지 마. 무엇 하나 사랑이 아닌 게 없음을 알면서 카게야마는 그런 말을 담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는 제 심장 어귀를 살살 쓰담고 있었다. 얼얼하다. 얼마나 많이 땅으로 떨어졌다 이곳에 위치하길 반복했는지. 심장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오이카와는 먼저 눈을 감아 보기로 했다. 밤, 카게야마의 시선은 여전히 그의 것이었다. 손을 살금살금 뻗어 그의 쇄골 부근 바로 앞에서 멈춘다.
“오이카와 상.”
“응.”
“내일은 점심까지 푹 주무세요.”
“그래.”
“싫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네가 시키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해? 웅얼거리는 말조차 사랑이었다. 몸을 잠식시켜오는 사랑은 익사할 만큼 아득했지만, 오이카와 토오루가 카게야마 토비오를 익사시킬 수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카게야마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가까이 있는 팔에서 가벼운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햇볕에 바짝 마른, 오이카와와 잘 어울리는 냄새가. 더듬더듬 스탠드를 껐다. 한 조각 불빛마저 사라진 방이 어둡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더 짙어진다. 아주 가까이에서 아주 멀리를 더듬으며,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잠에 몸을 맡겼다.
나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무한의 세계를 달리며 죽음을 몇 번이고 만난다. 아직도 악몽이 그치지 않는다.
너는 무슨 꿈을 꾸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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