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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하나] 온 우주가 사랑에 빠지라 등떠밀고 있었다
정오 글
조금 짧아요. :)
***
다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날의 마지막 당번은 하나마키였음에도 대신 체육관의 철문을 닫은 마츠카와가 양 손을 탈탈 털었다. 드르륵 무거운 문 두 짝이 마츠카와의 손에서 가볍게 입을 맞춘다. 하얀 반팔을 입은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하나마키가 달려가 오른팔로 그의 목을 감싸안았다. 구릿빛 피부 위로 올라온 땀들이 손끝에 감겼다. 놀랐잖아, 말하며 터지는 웃음이 청량하다.
“고마워. 오늘 당번도 아닌데.”
“고마우면 아이스크림.”
치즈 햄버그도 사줄 수 있어. 주머니에 들어있느라 구겨진 지폐를 흔들며 하나마키가 이를 드러냈다. 금세 커다란 손에 양 뺨이 눌리킨다. 자유로운 왼손으로 똑같이 그의 뺨을 누르러 가자 어떻게 알았는지 재빠르게 낚아챈다. 얼굴이 세로로 납작해질 것 같은 느낌에 하나마키가 결국 양 손을 들었다. 항복! 항복!
“무슨 맛?”
“하나마키, 너는?”
“나야 당연히!”
슈크림 맛! 하나마키가 마츠카와의 어깨 위에 팔을 걸쳤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차이나는 키에 어정쩡 불편한 자세가 된다. 웃으며 하나마키의 팔을 제 허리에 둘러주는 마츠카와의 행동이 자연스럽다.
“바닐라 맛이겠지.”
“슈크림 맛이 나는데?”
“이름이 바닐라잖아.”
“마츠. 저 고양이가 너보고 시끄럽대.”
장난스레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잡아당겼다. 학교 담장에 걸터앉은 얼룩무늬 고양이가 하암 긴 하품을 한다. 마츠카와가 하나마키의 채도 낮은 분홍색 머리칼을 흩뜨렸다. 여기저기로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마침 불어온 여름바람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봄 같네. 낮은 목소리가 웃음에 섞여 나왔다. 뭐가? 묻는 하나마키에 못 들은 척 말을 넘겨버린다.
“덥다.”
“그래도 바람 부니까.”
여름 치고는 괜찮은 날이었다. 습도가 낮고 해도 곧 산 너머로 넘어갈 듯 싶었다. 후끈한 공기를 식혀줄 바람도 적당히 불고 있었다. 흘끔흘끔. 하나마키의 시선은 삼 년을 봐왔던 마츠카와에게 자꾸만 붙었다. 린스를 하지 않아 푸석한 감이 있는 검은 곱슬머리가 조금 자란 것 같았다. 손으로 헤집으면 두 마디쯤 잠길 지도 모르겠다. 구릿빛 피부는 여름 내리쬐는 햇살에 조금 더 그을려 있었다. 쳐다보는 걸 눈치챘는지 삐죽 올라간 입꼬리가 예쁜 입술이 ‘왜?’ 물어온다. 짙고 두꺼운 눈썹도 찡긋 같이 위로 올라갔다.
“으응. 그냥.”
하나마키가 시선을 돌린다. 머리가 아찔한 게 생각도 없던 말을 맘대로 뱉어낼 것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확실히 앳된 마츠카와. 마츠카와의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키만 덜렁 큰 게 아니라 체격까지 탄탄했고 기본적으로 냉랭해 보이는 표정이 그를 더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몇 마디를 나눠 보니 마츠카와는 보기보다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이카와가 ‘맛층, 요즘 오이카와씨를 위협한다구?’ 말할 정도로 인기도 좋았다. 입도 무거워서 고민거리도 자주 털어놓곤 했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좋은 친구가 돼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마츠카와. 나 좀 잘생긴 편인가?”
“너?”
농담처럼 내뱉은 말에 눈썹을 모으며 고민한다. 하나마키가 가던 길을 멈추고 턱 아래 꽃받침을 만들었다.
“이름 같으세요.”
툭 내뱉은 마츠카와가 성큼성큼 하나마키를 앞질러 걸어간다. 한참을 무슨 말인가 곱씹던 하나마키도 이내 잔망스런 걸음걸이로 마츠카와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지는 해에 머리가 조금 더 붉어졌다. 조금 더 어두운 분홍색의 눈동자가 하늘을 한 번 마츠카와를 한 번 바라보았다. 하굣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한 두 시간 늘려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겨울에 눈 맞으며 온천 할 수 있는 시골로 놀러 갈까.”
“아, 우리?”
“응. 우리.”
“그러면 오이카와한테 짐 다 들라고 하자!”
“아니, 하나마키. ‘우리’ 말이야 ‘우리’.”
마츠카와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하나마키에게 무언가를 피력하고자 할 때 내는 목소리였다. 마츠카와와 단 둘이 어디를 떠나본 적은 없었다. 부활동에 바빠서 그렇다고 치더라도 어째 단 둘만을 염두에 둔 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었다.
싫어?
마츠카와가 생각을 파고들었다. 장난처럼 던진 말 치고는 진지해서 이내 그러자고 대답을 한다. 물음을 끝으로 마츠카와는 더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런 사이였다.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아도 어색할 것 없는. 그런데 하나마키는 갑자기 이 고요가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미세한 어색함이 새봄의 호수처럼 녹아나온다. 귀를 쫑긋 세우고 마츠카와의 숨소리를 들어보았다. 꼭 목소리처럼 낮고 그릉그릉한 숨결이 느리게 들어가고 다시 나오고 있었다. 간질간질 꽃나무 아래에 선 것도 아닌데 코끝이 간지러웠다. 입을 꾹 깨물고 죄없는 가방끈만 잡아당겼다.
“빨리 가을 왔으면 좋겠다.”
“나는 싫은데.”
“응? 더워 죽겠다고 가을 언제 오냐고 하던 건 너잖아.”
“아무튼 싫어.”
지금 이 순간을 길게 늘일 수 있다면 가을은 느리게 찾아와도 좋을 것 같았다. 하나마키가 손등을 긁적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오늘은 어떻게 기억될까. 심한 경우 잊혀 추억조차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이 순간 이 감정을 모조리 카메라로 담아 돌려보고 또 돌려보고 싶었다. 심장이 물에 잠긴 것 같았다. 찡한 감정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밤이 낮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잇세이.”
“히로.”
소중하다는 건 이런 거였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름을 불러도 똑같이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것. 타기 전의 연탄처럼 새카만 눈동자에 용케 제가 가득 담겼다. 마츠카와의 이런 센스를 마주할 때마다 입꼬리 가득 웃음이 차오른다. 애써 아래로 끌어내려 보아도 마치 중력을 무시라도 하는 것처럼. 평소보다 훨씬 처진 걸음걸이로 내리막을 내려가던 하나마키가 걸음을 뚝 멈춘다. 발맞춰 걷던 마츠카와에게 잠깐 먼저 걸어가 보라고 말한다. 그에 마츠카와는 의아한 듯 눈썹을 올리고는 순순히 먼저 걸어갔다. 하나마키는 문득 놀라운 사실을 안 것 같았다.
마츠카와의 걸음은 빨랐다. 삼 년을 몰랐던 사실이었다.
“마츠! 같이 가!”
조그맣게 말해도 들릴 거리였지만 소리를 쳤다. 소리를 치지 않으면 마츠카와는 영영 멀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 조금 큰 소리로 대답한 마츠카와가 그 자리에 멈춰 선다. 등을 돌려도 될 텐데 시선은 하나마키의 걸음에 고정돼 있었다. 먹고 있던 카라멜이 있다면 분명 목구멍에 걸렸을 것이다— 하나마키는 생각했다. 온몸이 마비될 만큼 지독한 단내의 이름은 다정함이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친절이 맞는지. 정말 그저 오랜 친구의.
“안 궁금해?”
“뭐가.”
“나 왜 갑자기 너 혼자 걷게 했는지.”
“궁금해.”
“물어보지.”
“네가 말해주고 싶으면 말해주겠지.”
그냥 이렇게 생각했어. 마츠카와가 미소를 지었다. 따라서 웃을 수 밖에 없는 미소였다. 발을 바라봤다. 아까의 빠른 걸음은 온데간데 없고 하나마키와 발을 맞춘 걸음이었다. 히야아. 하나마키가 크게 기지개를 폈다. 하나마키와 마츠카와가 주로 가는 가게는 경사가 급한 언덕 꼭대기에 위치했다. 아스팔트 오르막 끝에는 지는 해가 붉은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꼭대기에 서면 해를 만질 수 있을 듯이 선명한 모습이었다. 아름다운데, 어딘가 울적하다. 주머니 속 돈을 쓰다듬으며 오르막을 올랐다. 뒷머리를 타고 땀방울이 흐르지만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늘 무슨 맛 먹을 거야?”
“딸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닌데. 섭섭하다? 우리 얼굴 본 시간이 얼만데.”
농담이 분명한 말이었다. 평소처럼 넘어가면 될 말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우뚝 하나마키의 행동이 정지했다. 짙은 진달래 색 눈동자가 시선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츠카와는 저에 대해 모르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저는 마츠카와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아는 거라곤 고작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모두들 알고 있을 법한 단편적인 이야기. 그러고보면 마츠카와는 제 이야기를 잘 들려주지 않았다. 언제나 하나마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고 또는 조언을 했을 뿐.
소중한 마츠카와.
내게 네가 그런 만큼 네게도 내가 소중할까?
“왜 그래? 농담이었어.”
당황을 담은 눈이 하나마키를 샅샅이 훑었다. 하나마키의 입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삐죽 웃음을 담았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얼어붙어 흔들리고 있었다. 양 뺨이 잡혔다. 빈 공간 없이 눈 앞에 마츠카와의 얼굴이 가득하다. 아주 짙어 갈색이라곤 조금도 섞이지 않은 듯한 검은색이 걱정을 가득 채웠다. 가까이서 바라본 마츠카와가 낯설다. 짧고 빽빽한 속눈썹이라든가 걱정을 할 때 두 가닥 주름이 지는 미간 같은 것들이.
“아냐, 아무것도.”
“……하나. 나 초코맛 먹을까?”
“너 먹고싶은 거 먹어야지.”
짧은 곱슬머리를 양손으로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이스크림 맛 때문에 하나마키의 속이 상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딸기맛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얼어붙었던 표정도 봄날의 기온처럼 사르르 풀렸다.
마츠카와, 네 마음씨가 너무 고와. 네 눈동자가 너무 다정해. 네 손끝이 너무 섬세해. 네 모든 게 너무 소중해. 그래서 나는…….
“자 딸기맛!”
“넌 바닐라지?”
“어허. 슈크림맛이라니까 또 그러네.”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축이려고 하지만 웬걸 혀까지도 버석했다. 마른 입 안을 확인만 한 꼴이 된 하나마키가 웃었다. 조금 처진 눈은 말똥말똥하고 입만이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멋쩍을 때 나오는 표정이라는 걸 알았지만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분홍색 머리가 잔상처럼 어른어른 눈앞을 괴롭혔다.
“와. 해 지네.”
“오늘도 다 지났다, 그치?”
“응. ……아 예쁘다. 세상이 불타는 것 같아.”
가게의 유리문을 열고 나선 밖은 노을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가게가 높은 언덕에 있어서 시야로는 넓게 펼쳐진 하늘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에 붉은빛이 감돈다 싶을 정도로 바라본 노을이 지는 오늘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때마침 불어온 여름 바람이 사각사각 머리를 헤집고 지나갔다. 후텁지근한 바람의 온도는 아무래도 저 지는 해에서 옮은 듯했다. 귓가로는 방금 닫힌 문에 달려 있던 종 소리가 딸랑딸랑 울려퍼진다. 모르는 새에 아이스크림을 가져간 마츠카와가 그것을 까서 하나마키의 손에 쥐어 주었다. 노란색이 맴도는 하얀 아이스크림 주위로 얼음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하나마키가 입 한 가득 아이스크림을 물었다.
“흐어?! 부터떠, 부터떠!”
바싹 말라있었던 입의 탓인지 아이스크림이 그만 혀와 입천장에 달라붙고 말았다. 다 뭉그러진 발음으로 하나마키가 우는 소리를 내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차가움에 황급히 아이스크림을 떼려 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
“혀까지 뜯기겠다. 잡아뜯지 마.”
“어떡깨, 어떡깨. 탸가워!”
“아 정말.”
파닥파닥. 아이스크림을 주욱 떼다가 아파서 인상을 쓰고 또 가만히 놔두다가 차가워서 인상을 쓴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아이스크림에 하나마키가 점차 울상이 되어 갔다. 상처가 날까 걱정하며 그런 하나마키를 말리던 마츠카와가 결심한 듯 제 딸기 아이스크림을 하나마키에게 건넸다.
“아 해봐.”
“아?”
“응. 가만히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인지할 틈도 없었다. 벌려진 입 안의 혀로 말캉하고 따뜻한 무엇인가가 닿아 왔다. 그것은 아이스크림의 달라붙은 부분을 살살 쓸어 녹이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혀끝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무슨 맛이 나는지 촉감이 어땠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시간은 멈춘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고 온 세상은 심장 박동만이 가득했으므로. 드디어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정한 손가락이 끈적한 액체 범벅이 되어 입 안에서 튀어나갔다. 흐물흐물하게 녹아든 아이스크림을 붙잡은 채였다.
“하나마,”
“잠깐. 이름 좀 불러봐.”
“타카히로. 다 녹아 버렸네. 새 거 하나 사줄 테니까,”
“아. 잠깐만 도저히 안 되겠어.”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터질 듯 붉어진 것 같았다. 노을이 얼굴에 드리워서 그런 것이다, 자기 위안을 하는 내내 마츠카와의 얼굴과 손만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붙잡은 하얀 액체로 범벅이 된 손가락. 부르란다고 정말 이름을 부른 입술. 적당히 배나온 땀이 식어갈 정도의 바람. 노을, 오르막, 아스팔트, 가게, 종소리.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가게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이든 주인.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뜨거운 여름. 하나마키의 입술을 타고 한숨이 삐져나왔다.
온 우주가 사랑에 빠지라 등떠밀고 있었다.
“너, 너 애인이 있었던가?”
“……? 아니?”
“그,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라든가.”
“어……?”
“아니 뭐 그건 상관없고.”
지금부터 제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 같은데, 놀라지 말라고 미리 알려드려요. 비록 마음 속이지만.
씨익. 오늘 웃었던 웃음 중 가장 쾌청한 웃음이었다. 아? 하나마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마츠카와가 의문 섞인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를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의 손에 각기 들린 서로의 아이스크림은 이미 녹아 아스팔트 위에 자국만을 남긴 채였다. 하나마키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봄도 아닌 주제에 간질간질한 것이 꼭 고백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마츠카와를 위한 자그만 변명 하나를 남겨두고선 조심히 짝사랑이란 씨앗을 어느 한 구석 심어놓는다.
어쩔 수 없었는걸. 온 우주가 사랑에 빠지라 등떠밀고 있었는데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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