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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쿠니] 초겨울의 축음기
정오 글
약간 짧아요.
***
쿠니미 아키라는 한여름에도 미지근한 물로 몸을 씻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약간 뜨거운 물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오른손으로 온도를 맞추며 수도꼭지를 돌렸다. 겨울의 공기와 맞물려 수증기가 피어났다. 휘휘 고개를 젓는다. 덜 마른 머리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튀었다. 그에 계절을 증명하듯 건조해진 손끝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를 올려다본다. 그는 마치 제가 한 게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창틀에 턱을 괴고 있었다. 시린 바람이 흑단같은 머리칼을 흐트린다. 다시 고개를 물에 집중했다. 플라스틱 통을 열어 마른 국화 세 송이를 물에 띄웠다. 노란 것이 두 개 보랏빛이 하나였다. 잘못 건들면 바스라질 듯 연약했던 국화가 화려하게 개화한다. 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대야에 시선을 고정한다.
“별…….”
미적지근한 음이 들려온다. 고개를 들면 새카만 눈동자가 이곳을 직시하고 있다. 여름보다 자란 머리는 귀 아래에서 바삭거린다. 쿠니미가 내놓는 올곧은 시선은 여전히 견디기 힘들 만큼 그를 떨리게 만든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눈앞에는 크고작은 멍들로 얼룩덜룩한 다리가 있다. 살며시 들어올려 받아놓은 물 안에 넣었다. 굴절된 발이 어른거린다.
“뜨거워?”
“아니.”
킨다이치 유타로가 웃음지었다. 약간 잠긴 목소리가 아주 오랜만에 꺼내어 듣는 CD 같았다. 먼지가 올라탄 것을 지문이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 들고서는 매끄러운 휴지로 쓸어낸다. 역시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낡은 라디오에 달칵 소리가 나게 끼우고 재생 버튼을 누르면 뻑적지근한 음이 울려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윤이 날 테다. 무심하게 기억을 더듬을 즈음 겨울바람이 머리에 내려앉았다. 머리 몇 가닥이 정전기와 함께 나풀거린다. 겨울인가. 흰 천장을 한 번 쳐다보았다. 입김이 나오기 직전의 날씨다.
“마실래.”
들고 있던 푸른색 컵을 그에게 내밀었다. 킨다이치가 물 묻은 오른손을 흔들었다. 코끝까지 다가온 컵에서는 짙은 모과 향이 났다. 안에 든 삐뚤빼뚤한 모과는 작년 이맘때 킨다이치가 담가 선물한 거였다. 일 년은 가만히 둔 뒤에 타 마시라 했는데 거짓말처럼 딱 일 년이 지났다.
일 년이 지났다.
“조심해. 겨울엔 잘 낫지도 않는다더라.”
쿠니미의 오른쪽 발목에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로드워크 중에 삐끗한 발목은 푸른 멍들로 뒤덮여 부어올라 있었다. 손으로 쓸어보고 싶었지만 그가 아파할 것 같아 하지 않는다. 쿠니미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발에 집중하느라 생긴 미간의 주름이 깊다. 좀 더 다쳤으면 울겠네. 건드는 말에도 속상함이 풀리지 않는가보다. 살아오며 별로라고 늘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마음이 여린 것은. 그러나 킨다이치는 마음이 여렸기에, 마음에 담아 놓은 이상이라는 건 다만 이상일 뿐이고 언제든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라는 걸 쿠니미는 그를 통해 깨달았다. 그의 미간도 살풋 좁혀졌다. 다시 생각을 정정한다. 깨졌다기 보다는 포괄한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여전히 킨다이치의 여린 마음과, 그로 인해 쓸데없는 것들에 연연하는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와 이런 관계가 되어 두 번째 겨울을 맞는다는 건 그가 분명 그의 그런 면마저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괜찮으면 올해도 만들까. 그거.”
“좋을 대로.”
들고 있는 머그컵을 빙글빙글 돌렸다. 안에 든 모과차가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흥미가 없어져 입술을 댄다. 그 사이에 식었는지 찬기가 도는 액체가 입안을 적셨다. 달큰한 것을 혀로 굴려 보았다. 액체는 얼마 남지 않아 모과 건더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가락으로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는다. 딸깍 컵을 창가에 올려두자 아주 은은한 국화 향이 코를 감싼다. 킨다이치의 선택이 제법 괜찮은 것 같았다.
“다리에 밴드라도 감는 건 어때?”
창백하고 얇은 피부를 가진 쿠니미는 똑같이 연습을 해도 항상 더 많은 찰과상과 멍을 달고 다녔다. 속상한 목소리가 어른스럽다. 괴리감이 든다. 중학교 때부터 봐왔던 그의 모습과는 달랐다. 어떤 모습이 좀 더 좋냐고 묻는다면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어른스러운 쪽이 취향이라곤 해도 킨다이치가 굳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불편해서.”
입을 다물었다. 쿠니미는 하기 싫은 일은 결코 하지 않았으니 아마 밴드도 감지 않을 것이다. 그는 킨다이치와는 아주 많이 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닮은 점을 찾기가 더 힘들 테였다. 그러나 누군가 그런 말을 한대도 킨다이치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 예정이었다. 잘 알기에 서로를 묵인하고 있었다. 상대에게 원하는 모습이 있다고 해도 입밖으로 나오는 것들은 그중 극소수였고, 그마저도 상대가 그에 맞춰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게 안 맞춰줘도 된다는 생각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랑에 빠졌던 것은 자신과는 정반대인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가 가진 모든 다른 점들을 사랑하기에.
“이제 슬슬 춥지? 로드워크 할 때 입는 반팔도 안에 다 집어넣었어.”
“몸은 따뜻해야 하니까.”
나른한 미성이 아침 커튼 사이의 빛처럼 스며든다. 춥고 더운 것을 싫어하는 그는, 시려운 계절이 온다 싶으면 따스함을 사랑했다. 킨다이치가 쿠니미의 맨발을 더듬었다. 매끄러운 피부는 발바닥에 다가갈수록 점차 굳은살이 자리했다. 그가 스파이크를 할 때 힘을 주는 부위와 블로킹을 할 때 땅을 박차는 부위는 거칠고 딱딱하다. 신발에 짓물려 난 상처의 흔적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물을 끼얹었다. 그새 식은 것 같아 다시 온도를 맞춘다.
“가끔은 신기해. 너는 어떻게 배구를 하는 걸까. 너랑은 좀 안 맞는 운동 같아 보였다고 할까.”
“…….”
“처음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았어. 네가 배구를.”
쿠니미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한다.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주제였다. 코끝을 실룩거린다. 킨다이치는 늘 쿠니미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다. 그가 언제 대답하길 원하고 언제 원치 않는지를 훤히 꿰는 것 같았다. 킨다이치가 남긴 공백을 더듬는다. 글쎄, 좋아한다는 건 또 뭐지. 의문이 구름 낀 하늘처럼 묵직했다. 문득 이 상황이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한다. 시간은 둘을 남겨두고 흐르는 것 같았고 그 사이 틈에 끼인 듯한 느낌은 서늘한 게 제법 괜찮았다. 무슨 어린애 몸을 씻기듯 조심스럽게 발을 쓰다듬는 킨다이치의 손길에 그가 푸르르 입술을 털었다. 의도한 적은 없지만 하루종일 가장 홀대받던 신체는 그의 손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되어 태어난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에 직접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진 않지만 그가 행하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묵시적으로 감정들이 드러나곤 한다. 느리게 또 느리게. 쿠니미는 느린 것도 괜찮았다. 어느 순간 천천히 물들어 버리는 여름날 흰 옷과 수박처럼.
“좋아하는 거…… 내가 좋아하는 게 있긴 할까.”
킨다이치가 쿠니미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심통난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섭섭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귀고 나서도 달라진 건 없었고 그저 손을 잡는다거나 입을 맞추는 게 다였으므로. 쿠니미는 궁금해졌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제가 살아가기 위해 구태여 정의내릴 필요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렵고, 복잡하고, 명료하지 않은 것. 그렇다면 제가 킨다이치를 바라보는 것은 무어라 말할 수 있을지. 킨다이치는 다시 그의 발에 집중하고 있었다. 새큼한 과일 향이 나는 분홍색 바디워시를 쓱쓱 문질렀다. 보글보글 일어나는 거품은 흰색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이름모를 바디워시처럼 분홍색을 지녔다고 해서 반드시 분홍색이 그에게 전해지는 건 아니다. 다행히 아직은 분홍이 옮아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아프지 마 아키라.”
으음. 쿠니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름을 불리는 것은 어색하고도 묘한 느낌이다. 킨다이치는 이따금씩 그를 아키라라고 불렀다. 익숙해졌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마음이 따끔거리고 목구멍까지 말의 덩어리들이 가득 차오를 뿐이었다. 그는 저를 잔뜩 신경쓰고 있었다. 쿠니미 자신조차 그렇게까지 저를 아낄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였다. 불그스레 달아오르던 뺨이 찬 공기를 맞고 사그라든다. 문득 킨다이치가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키라. 너는 봄에 태어나서 이름도 봄 같은가봐.
꽃샘추위로 춥기만 한 3월은 킨다이치의 목소리를 타고 따스한 봄이 되었다. 그때의 기분은 굳이 기억하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아주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네가 겨울에 태어났어도 나는 똑같은 말을 했을 거야. 아키라. 너는 겨울에 태어나서 이름이 봄 같은가봐.
“유타로.”
“응. 어? 어어…….”
비눗기가 헹궈진 발을 다시 받은 깨끗한 물에 넣었다. 그가 쿠니미의 오른발을 쥐고 주물거린다. 기껏 걷어올린 바지가 젖어들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방법대로 검지 발가락 아래를 꾹꾹 눌렀다. 피로회복에 좋다던 자리였다. 쿠니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들어올린다. 킨다이치의 이름을 불렀다. 수많은 아키라, 아키라, 아키라들과 단 하나 삐져나온 유타로. 가볍게 대답했던 킨다이치가 놀란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뭐, 뭐야. 갑자기…….”
등을 둥글게 말아 그에게서 얼굴을 숨긴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축축하게 그를 불러왔다. 언제나 가득하던 건조함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쿠니미가 그 나른한 눈동자로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해졌지만 고개를 들면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올 것 같아 마음을 접는다.
“유타로.”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덜 말려 축축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흠칫 놀라는 킨다이치의 뺨을 긴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간다. 화끈거린다. 허리를 숙여 그의 목을 쓸어올리고 턱 부분을 쥐었다. 자연스레 들린 얼굴을 바라본다. 떨리는 눈동자를 가지고서도 피하지 않고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그를 바라본다. 제가 곁에 있을 적이면 항상 놓치지 않고 따라붙는 눈동자. 서투른 다정함과 한바가지의 사랑이 섞인 시선. 오롯이 통하는 눈동자의 말은 잔인하다. 당장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뜨거워진 몸에 시린 바람이 부닥쳤고 가라앉은 체온에도 가슴팍은 여전히 열기로 가득했다. 파르르 떨림과 함께 감기는 눈꺼풀과 동시에 킨다이치의 몸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사그락거리는 검은 머리가 그의 뺨 어딘가를 뒤덮고 까슬거리는 입술은 몇 번 입술 주위를 헤매다 금세 제 자리를 찾아간다. 그가 제게 전하는 마음만큼이나 뜨겁다. 힘겹게 숙였던 허리가 살며시 펴진다. 한 손으로 쿠니미의 뒤통수와 뺨 사이 어딘가를 받친 손이 따스했다. 물이 튀기지 않게 일어나 다른 손은 그의 다리 곁을 짚었다. 쿠니미가 아주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약간 급하게 들어오는 혀를 밀어내고서 아랫입술을 따끔할 정도로 물었다. 그의 입술이 닫혔다. 마음에 든다는 듯 핥는다. 연한 모과향이 입술과 입술을 감싸고 돈다. 그를 살짝 밀어낸다. 깜빡이며 뜨인 눈앞에 비친 킨다이치의 입술이 반들거렸다.
“나도 늘 그래.”
“뭐가?”
“늘 너랑 같은 마음이니까.”
걱정 말고 나를 사랑해.
고민한 음성에 킨다이치가 입술을 말아올려 웃음지었다. 혀로 제 입술을 핥자 쿠니미가 마셨을 모과청의 맛이 났다. 쌀쌀한 겨울이 검은 두 개의 머리칼을 헤집는다. 좋네. 시린 것도. 떨린 말에 쿠니미가 조그맣게 웃었다. 다시 시선이 엮인다. 좀전과는 조금 다른 감정을 품은 눈동자가 같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건조한 이마가 부딪힌다. 그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을 담그고 있었던 물은 쏟아 버리고 대야는 욕조 밖으로 떨어뜨린다. 흥건한 물에 몸이야 젖든 말든 개의치 않고 킨다이치 위로 몸을 겹쳤다. 편치 않은 자세에 몇 번 뒤척인 킨다이치가 쿠니미를 아래로 보낸다. 피실 터져나오는 웃음에 벌어진 입술을 향해 직진했다. 아까 쿠니미 곁을 짚었던 손은 그의 허리를 쓰담고 있었다.
이번엔 쿠니미의 혀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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