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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성장통
부제: 도라지 정과
정오 글
•성관계에 대한 언급 있습니다. 직접적인 묘사는 없습니다만 불편하신 분은 읽지 말아주세요.
***
키타이치에서 오이카와가 맞이하는 마지막 합숙이었다. 밤에 잘 곳이 있으니 훈련은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선수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오이카와는 부러 마지막으로 샤워를 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늦게 도착하니 잠자리도 문에 가장 가까운 자리밖에 남지 않았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작은 약 하나를 꺼내 뻐끈한 두 무릎에 두껍게 펴발라놓았다. 어릴 때부터 성장통이 많이 찾아왔던 그가 내놓은 묘책이었다. 운동 후 무릎이 아프다 싶으면 무조건 근육통 약을 바르고 다리를 높게 한 채로 잘 것. 졸린다. 눈이 감겨왔다. 점점 느려지는 눈의 깜빡임 사이로 눈동자가 보이다 안 보이다를 반복한다. 이내 어둠 아래 짙은 보라색 위로 눈꺼풀이 굳게 드리운다.
끙. 끄응, 낑. 갓 태어난 새끼 동물들이나 낼 것 같은 소리에 오이카와가 눈을 떴다. 천장은 여전히 어두웠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새벽빛도 없었기에 여전히 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상을 쓴 채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본다.
- 토비오?
해봤자 창밖의 고양이겠거니, 또는 악몽을 꾸는 동료겠거니 했던 생각은 바로 옆자리에서 들썩거리는 이불에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놀라 이불을 걷어보니 다리를 가슴 쪽으로 붙인 채 끙끙 앓고 있는 후배가 보였다.
- 오이카와상, 저 다리가 너무…….
그렇게 말하는 후배의 얼굴은 온통 눈물 투성이였다. 그와중에 폐를 끼치기는 싫었는지 이불 안에 숨어있느라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다. 안다. 그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기분을. 두 손으로 오른 다리를 주무르면 왼쪽 다리가 아프고 왼쪽 다리를 주무르면 오른 다리가 아픈. 겨우 잠드나 싶어도 가시질 않는 고통에 한밤에 깨어나 끙끙대며 새벽까지 앓아야 했던.
- 아픈 거 처음이야?
- 그런 건 아닌데 오늘이 너무…….
그래 그런 날도 있었다. 평소보다 심하게 아파 어쩔 줄 몰랐던 날. 오이카와는 그런 날이면 이불 위에서 무릎을 꿇고 상체를 늘여 바닥으로 붙이곤 했다. 감당하기 힘든 아픔과 차오르는 서러움에 언제나 얼굴 아래의 이불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루를 노력했다는 증거 치고 너무도 가혹하다고 느꼈다. 밤마다 오이카와를 찾는 고통은 그 세기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에게 1위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세계 최고를 원한 건 아니었다. 오이카와가 원했던 건 미야기에서 우뚝 서는 일. 다만 한 번이라도 미야기 현의 배구대회에서 우승하는 일. 결과로 돌아오지 않는 고통은 물을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는 갈증처럼 점점 더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오이카와가 안면 가득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릴 적 먹어본 도라지 정과가 떠올랐다. 달착지근하고 쫀득한 맛에 하나를 다 먹고 나면 꼭 도라지 한 뿌리만큼의 크기로 몰려오던 쓴 맛이. 카게야마 토비오는 저와 닮아 있었다. 단 하나, 오이카와가 성장통에 이를 갈며 원했으나 결코 가지지 못했던 천재적인 재능만을 제외하고.
- 다리 이리 내.
카게야마는 도리도리 고갯짓을 했으나 다리는 이미 오이카와의 쪽으로 와 있었다. 오이카와는 목에 모래 몇 알이 걸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직 덜 자란 다리가 제 한 손에 잡혀 있다.
—손아귀에 강하게 힘을 주면 부술 수도 있지 않을까.
가장 아팠을 무릎부터 주물러나간다. 흐느끼다시피 아파하던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오이카와상은 새, 생각을 읽으시는 것 아닙니까. 저도 멋쩍었는지 단어를 더듬으며 어린 아이나 할 법한 말을 내어 놓았다.
- 어디가 아픈지 완전 잘 알고 계시니까…….
다른 선수들이 잠에서 깨지 않을 만큼 낸 작은 목소리였다. 변성기가 왔을까. 제 2년 전을 생각해보던 오이카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너처럼 아팠었다는 말은 접어두기로 했다. 제 말에 대답이 없으니 머쓱한 듯 카게야마가 합, 입을 다물었다. 다리를 보느라 보이지 않는 얼굴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처럼 짐작할 수 없었다. 밤이라 검게 빛나는 눈동자에 잠이 서린다. 눈을 완전히 감았다가도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고통이 줄어든 게 이유였다.
- 성장통.
- 네?
- 성장통이야. 네가 쑥쑥 자라고 있다는…… 뭐 그런 거. 어른이 되기 전까지의 아픔은 다 성장통일 뿐이다, 이해해? 추상적인 것까지 포함해서.
- ……잘 모르겠습니다.
- 괜찮아. 그냥, 언젠가는 다 지나간다는 거야. 네가 노력하지 않아도 말이지.
성장통. 언젠가 다 지나갈 일, 겪는 모든 아픔. 오이카와가 입 안 살을 꾸욱 깨물었다. 제 성장통이 어디쯤 왔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 어른이 되면 가끔 저를 몸서리 치게 할 만큼 격해지는 치기가 가라앉을 수 있을까. 의식하지 않으려 할수록 밀려오는 못된 질투를 눈 녹듯 없애버릴 수 있을까. 오이카와의 눈에 카게야마가 담긴다. 카게야마는 아직 중학교 1학년일 뿐이고 경기도 제가 더 잘 이끌 수 있다. 재능과 노력 범벅이 된 그가 자신을 뛰어넘는 건 오늘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올곧은 자세로 끈질기게 서브를 눈으로 좇는 그가 미웠다.
- 너는 그냥 더 성장하고 싶을 뿐이잖아 그렇지?
-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까. 오이카와상도 그렇고요.
- 나? 글쎄…….
여전히 한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너와 한계와 부딪힌 나. 오이카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이라곤 쑥 들어간 검푸른 눈동자가 말갛다. 오이카와는 지금껏 한계와 싸워왔다. 한계는 병아리를 둘러싼 막처럼 오이카와에게 존재해왔다. 무리라는 걸 알았다. 막을 깨고 싶었지만 동시에 깨는 것을 두려워했다. 막 안에서 거대한 제가 막을 넘어서서도 거대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지쳐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냥 나는 이 막 안에서 한 번만 최고의 자리를 거머쥐면 되는 거였는데. 최고의 세터이자 최고의 리더가 되고 싶었는데.
- 시라토리자와에 가실 것 아닙니까?
- 절대로.
- 네?
- 절대로 싫어.
- 아……. 하지만 저는 오이카와상이라면 당연히 거기로 가실 줄 알았습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음성이었다. 오이카와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아오바죠사이에 갈 거야. 그의 턱이 파르르 떨려왔다. 범재들이 죽어라 노력하는 그곳에서 최고의 팀을 만들고 싶었다. 아까 발랐던 근육통 약을 카게야마의 튀어나온 무릎뼈 바로 아래에 펴발랐다.
- 하지만 오이카와상은 최고의 세터인데…….
- 토비오. 주제를 넘지 마. 아오바죠사이는 최고의 팀이 될 거고, 그때의 아오바죠사이를 미리 무시할 수 있는 권한 따위 네게 없어.
-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 됐으니 이만 자. 내일도 훈련이 있으니까.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바닥에 깔려 있었다. 냉정하고 차분한, 원래의 오이카와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카게야마는 문득 몸이 시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원래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어떤 모습일까. 햇볕 냄새가 쨍쨍 날 것 같고 주변에 밝은 공기가 피어오르고 모두를 웃게 만드는 사람이 정말로 오이카와의 본모습이 맞을까. 한 번도 염두에 둔 적 없던 생각들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지금의 모습이 오직 제게만 해당되는 일이라면 마음 한 구석이 저릴 것 같았다. 미움이나 단순한 싫은 감정으로는 오이카와에게 저를 표현할 수 없었다. 부글부글 들끓는 증오. 오래 전부터 뿌리를 내려 곧게 선 것. 그 아래 종이 한 장 만큼 얄팍하게 깔린 도무지 명명할 수 없는 감정까지. 무의식적으로 카게야마의 몸이 오이카와 곁에서 살짝 멀어졌다. 모르겠다. 아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당신을.
카게야마가 불행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네가 나보다 뛰어난 잠재력만 가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너를 예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주 미약한 미안함이 나풀거렸지만 오이카와는 억지로 그것을 못 본 체 했다. 감정은 눈을 감아버리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찝찝함이 그를 자꾸만 엄습해왔다. 잘못되었다고 오이카와를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밤새 잠들 수 없었다. 외면했던 감정들이 똘똘 뭉쳐져 그를 덮쳐왔다. 억지로 쌓아왔던 강인함이 무너지고 고통스런 기억만이 범람한다. 여지껏 그 모든 고통 위에 서 있는 줄 알았는데. 한가운데 수몰되고 보니 저는 가장 아래에서 겨우 둑을 쌓고 덜덜 떨고만 있던 것이었다.
다음 날 오이카와는 한참을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고 카게야마와 교체되고 말았다. 그래,
나는 여전히 너의 불행을 바란다.
*
불행하다.
당신에게 안기는 모든 순간이
불행하다.
“오이카와상. 아, 아…….”
콰득 소리가 날 것마냥 어깨가 씹혔다.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미간이 찌푸려지는 카게야마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오이카와가 끈덕지게 어깨를 깨물었다. 씻은지 얼마 안 된 살에선 비누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저보다 조금 더 뜨거운 상체는 그의 혀가 굴러가는 모양대로 흠칫흠칫 떨리길 반복한다. 이미 카게야마의 온몸은 울긋불긋한 자국들로 가득했지만 개의치 않는다. 아파하는 소리에 입술을 뗐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어깨엔 짙붉은 자국 하나가 남았다. 이것은 시기에 눈먼 소유욕이다. 마음 속으로 이름 하나를 새긴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의 가슴팍 부근으로 손을 가져갔다. 닿을 듯 말 듯 쓰다듬으면 카게야마가 입술을 깨물어 소리를 참는다.
“뒤 돌아, 토비오.”
“…….”
오이카와는 단 한 번도 카게야마의 얼굴을 본 채로 몸을 섞지 않았다. 거부감을 드러낼거라 생각했던 카게야마는 의외로 고분고분했다. 희미한 등불 아래 도드라진 척추뼈가 오롯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이라거나 그의 또 며칠 전쯤 새겨놨을 자국들은 시간이 흘러 초록으로 파랑으로 옅어져 갔다. 검지로 하나하나 훑어 내린다. 키스마크라는 이름은 이 얼룩들에 어울리지 않았다. 멍. 멍이라고 불러야지. 수없이 겹쳐지고 옅어지고 또 진해지는, 족쇄와 같은 멍. 대개 달콤하기 그지없어야 할 행위에는 쓴맛만이 가득했다.
“허윽……!”
갑작스레 들어온 이물질에 카게야마의 고개가 휙 뒤로 꺾였다. 느릿하게 짜진 차가운 젤은 오이카와의 손가락 사이에서 뜨뜻미지근한 액체로 변해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쥐뜯듯 입술을 깨물었다. 오이카와가 바란 게 이런 거라면 그는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오이카와의 앞에서 저는 서서히 무너져갔고 서서히 망가져갔다. 뚝. 손등과 손등 사이로 눈물이 번졌다. 허리 아래로 느껴지는 허전함에 미리 숨을 고른다. 오늘은 얼마만큼의 고통이 저를 가득 채울까 계산을 해보지만, 이 행위는 배구 시합 결과만큼이나 예측하기 어렵고 무자비했다.
“토비오, 아. 토비오……”
“오, 오, 오이카, 흐윽, 억.”
귓가로 잔뜩 덥혀진 제 선배의 숨소리가 들어온다. 적당히 달아오른 공기가 후끈했지만 심장 부근은 점차 차갑게 식어만 갔다. 조그마한 얼음 조각들이 가슴에 바늘처럼 박혀오는 아픔이었다. 나이아가라 폭포 아래에서 조그만 양동이를 들고 선 기분이었다. 이 물들을 결코 모조리 담을 수 없음을 아는데. 나는 당신을 결코 모조리 담을 수 없음을 아는데. 마음에 담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손아귀에 강하게 힘을 주면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가슴 속으로 수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게는 단 한 번도 허용된 적 없던 ‘오이카와 토오루’ 라는 이름을.
“아프니 토비오?”
“허억, 아, 윽…….”
왜 내 이름을 불러서는. 왜 내 다리를 주물러서는. 왜 당신은 그렇게 아름다워서, 왜 그렇게 빛이 나서……. 나는 당신의 이름을 한 번도 부를 수 없는데. 당신의 다리는커녕 손끝에도 닿을 수 없는데. 절대로 당신 앞에서 빛이 날 수 없는데. 당신이 나를 아름답게 볼 리도 없는데. 알면서도 헛된 꿈은 왜 매일매일 크기를 부풀려 가고 욕심은 매일매일 강해져 가는 건지. 왜 당신은 아프도록 상냥하고, 그 와중에도 나를 아프도록 미워해. 억눌린 신음 사이로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수없이 몸을 겹쳐오면서도 서러운 울음이 터진 적은 없었는데 왜인지 꼭, 터질 것만 같았다. 왜인지 대체 왜인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물음들만이 그득했다. 카게야마의 손 한가득 이불이 잡힌다. 어지러운 머리처럼 주름이 진다.
“아, 아파요…… 허으…….”
오이카와의 허리가 잠깐 멈춘다. 그 틈은 여전히 아팠지만 눌러참고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정확히 3년 전쯤 오이카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게야마는 물어야만 했다. 이제는 오이카와에게 물어야만 했다.
“이것도 성장통입니까?”
“뭐?”
“아파요. 오이카와상, 저 너무 아파요……! 이것도 성장통입니까? 지나가는, 어른이 되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지는 성장통입니까?!”
오이카와는 수도로 떠난다고 했다. 한낱 후배와 더이상의 연락을 지속하진 않겠지. 그 생각을 하자 왈칵 눈물샘이 넘쳤다. 이제 성인이 될 테니 성장통 따윈 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은 오이카와와 관계를 맺는 마지막 날일 것이다.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저 몸을 섞곤 했던 후배로 성장통처럼 기억 안에 묻힐 것이다. 여기까지 상상이 미치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카게야마의 상체가 와르르 바닥으로 무너졌다. 힘이 풀린 팔이 눈물 범벅이 되었다. 오이카와에게 제가 성장통이라면 잊으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이카와가 제게 자신을 성장통이라 이름붙이게 한다면 카게야마는 응해 줄 생각이 없었다. 잊고 접어버리기엔 카게야마에게 3년이 너무 길었다. 또 지독했다.
“그래.”
오이카와는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몸이 미웠다. 머리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쾌락도 카게야마의 부서진 마음을 뛰넘기에 역부족이었다. 방은 오이카와의 거칠어진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불행하다. 마음에 담은 이가 선사하는 불행이 아프다. 카게야마가 천천히 몸을 떨기 시작했다. 오이카와가 만드는 박자와는 묘한 엇박이 인다. 분위기에 달아올랐다고 하기엔 너무 높은 열이 오른다. 오이카와의 움직임이 번뜩 멎었다. 카게야마를 뒤로 뒤집었다. 수많은 관계 중 처음으로 얼굴을 본 순간이었다.
“토비오쨩?”
“허으으, 허윽, 흐……. 미워요…… 아파요! 흐으으. 으욱, 으우우…….”
숨겨왔던 울음이 기어코 터지고야 말았다. 아래에서 바라보는 오이카와가 여전히 아름다웠다. 눈물에 가려져 반짝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더 가슴이 저렸다. 아주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모습에 당황한다. 당황을 안겨 주게 되어, 못난 모습을 보여주게 되어 미안했다. 제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도리어 미안한 마음에 카게야마가 끊임없이 볼에 강줄기를 그려냈다. 아프다. 델 것 같이 뜨거운데 얼 것 같이 시리다. 나는 당신의 서브를 존경하고 당신의 노력을 존경했다. 언제나 당신을 뛰어넘고 싶었고 밤마다 당신의 경기를 눈에 그렸다. 당신 고등학교 인생의 마지막 경기를 이기고서도 여전히 당신을 넘을 수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백 번 승부를 벌여 백 번 이긴대도 백 번 진 것과 다름없을 것이란 사실을.
“이만큼 괴롭혔으면 됐잖아요. 흐으으……. 이제는 좀 예뻐해줄 수 있는 거잖아요, 어윽…… 억, 흐어엉……!”
“…….”
“존경했습니다! 여전히, 여전히 당신을 존경하고 있어요…….”
궁금하다. 혀에 감기는 당신의 혀는 어떤 감촉일까. 하물며 입술에 닿는 당신의 입술은 어떤 느낌일까. 당신의 애정어린 표정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카게야마가 무너지듯 내뱉었다. 불순물이 잔뜩 섞인 존경을 오이카와의 코앞까지 밀어넣었다. 눈물로 뒤덮인 얼굴이 안쓰럽다. 그러고보니 둥근 머리를 한 번도 쓰담아 준 적이 없었다. 쿠니미를 킨다이치를 쓰다듬으면서, 단 한 번도. 나는 네가 불행하길 바랐을 뿐이지 상처받길 바란 게 아닌데.
내가 바랐던 불행은 이런 건가?
만일 그렇다면 나는 너의 불행을 바랐던 게 맞았나.
“3년동안 매일매일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
“토오루…… 상.”
“……아.”
“저를 수없이 안으시면서도 한 번 입맞춤 해주시지 않으셨죠. 이 다음 말을 듣고 나면 한 번만 입맞춰 주세요. 그러면 이제 그냥 다……”
성장통으로 치부하고 어찌저찌 잊어 볼 수 있을 지 모르니까.
“좋아합니다. 당신이 저를 미워하는 그 모든 날들을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 데 쓰고 있었어요…….”
입안에서 엉킨 말들이 힘없이 뭉그러졌다. 상상한 적 없던 고백을 전해준 카게야마는 세상이 무너질 듯 울고 있었다. 마를 새도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정리해줄 용기도 나지 않는다. 오이카와의 혼란스런 눈동자에 더 혼란스런 푸른빛이 담겼다. 나체에 울긋불긋한 자국들을 단 아이는 이제 고작 열일곱이었다. 거짓말처럼 도라지 정과가 떠올랐다. 쓰디써서 뱉고 싶었다. 그러나 분명 그 어딘가에서, ……. 아무리 봐도 카게야마와의 관계는 쓰기만 했는데. 그렇다면 맛의 순서가 뒤바뀌어 끝맛이 쓰지 않은 건 아닐까. 그 도라지 정과는 눈물 날 듯 씁쓰름하고
달착지근.
세상이 무너졌다. 억울한 통증이 가슴을 시큰 아리게 만든다. 그 통증의 이름은 애석하게도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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