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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온 타오름달을
정오 글, 생일을 맞이한 사랑하는 요밋(@Y0MMM__)님께
생일 정말 축하해
***
그맘때의 카게야마에게서는 술 냄새가 났다. 마시지 않던 것이었다.
그의 집에는 달력이 꼭 두 개씩 놓여 있다. 침대 바로 옆 벽, 시선이 가장 많이 닿는 곳이다. 오른쪽은 팔랑팔랑 달에 따라 다음 장을 내어 주지만 왼쪽은 늘 몇 개의 달에만 시간이 멈춰 있다.
손때는 보통 오월 초부터 묻기 시작했다. 서늘한 향에 심장이 저릿해질 즈음이면 투명한 시트지를 산다. 기포 하나 없이 반듯하게 그것을 붙이고 나서야 급한 숨을 몰아쉬었다. 첫해, 매일 쓰다듬는 통에 보풀이 일어나고 글씨가 번진 종이를 울적한 눈으로 쳐다보다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댕그랑 댕그랑. 선물 받은 시계가 열두 시를 알렸다. 땀이 바짝 올라 등에 반짝거리는 손이 조심스럽게 왼쪽 달력을 들어 내렸다. 오른쪽에 달려 있던 달력을 익숙하게 왼편으로 옮긴다. 알아차릴 새도 없이 떨어진 눈물이 둥근 무릎뼈를 축축하게 적셨다. 때맞춰 그가 나타나는 건 차게 식은 무릎을 문질러댈 즈음이었다.
“덥다, 그치?”
그에게서는 물과 볕이 섞인 냄새가 났다. 늘 한발 늦게 흙냄새가 따라왔다. 그는 언젠가 그것이 먼지잼의 내라고 말해준 적 있었다. 내(川)가 알려주는 내匂였다. 오이카와 토오루及川 徹. 그는 가람이었다. 검푸른 빛으로 바닥을 알 수 없이 깊은 강보다는, 가람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같은 의미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영 그랬다.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여름에만 잠깐 나타나는 크지 않은 내가 하나 있었다. 그의 할머니의 할머니 대부터 해마다 인사를 올리던 곳이었다. 인사를 올리던 날은 그가 부 활동을 빠지는 유일한 날이었다. 카게야마! 어딜 가는 거야? 매해 듣는 질문에는 하천河川이요, 그리 답했다. 그러면 그의 매해들을 기억하던 이들이 대충 말에 살을 붙여주곤 했다. ……하천夏川. 긴 앞머리가 땀에 달라붙을 정도로 달려가 마주한 내에서 그 이름을 부르면 사라락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내는 꼭 살아있는 것처럼 그를 맞이했다. 그는 이름을 부른다고 생각했다. 그 내 앞에서 부르는 단어는 남들은 알지 못할 유일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하천, 말하면 너울거리던 내는 마치 그의 말에 하는 대답 같았다. 여름 내께서는 여름 내가 난다. 다정한 성격은 아닌 할머니는 그에게 무뚝뚝하게 말했었다. 그 말을 들으며 누가 보기라도 할까, 비밀스럽게 스읍 들이쉬던 숨에 폐 저 아래까지 공기가 찼다. 그것은 뭍 내와는 사뭇 달랐다.
신이여. 쪼글쪼글한 손이 합장했다. 그는 고개를 숙였고, 그에게도 고개를 숙이라 했다. 이곳의 명맥을 이어 주는 분이시다. 너의 목숨을 이분께 빚졌지. 그는 어린 그로선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한 해 한 해 그가 장성해나갈수록 한 해 한 해 그는 쇠약해져 갔다. 마을 멀리까지 나가야 겨우 들리던 소음이 침대에 앉아 귀를 기울여도 무리 없이 들릴 때쯤이었다.
가질 수 없다, 빚진 것들이야. 그는 끝까지 스러지지 않았다. 욕심이 실린 눈들을 보지 못하도록 그는 그의 머리맡에 앉아 조용히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너는 내가 진 빚 중 가장 귀중한 것이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했다. 친척들은 숨이 진 그를 일컬어 소 힘줄처럼 질겼던 목숨이라고 했다. 유서는 명확했다. 그는 작은 산 하나를 전부 샀고, 그것을 전부 그에게 양도하겠다고 적어 놓았다. 네가 관리하기엔 버거워. 내게 주기 아깝다면 내게 팔아. 그득한 욕심들에도 그는 진저리 내지 않았다. 고개를 저었다. 속으로만 말했다. 가질 수 없어요. 빚진 겁니다.
-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나를 가질 수 없다고?
- ……빚진 겁니다.
입하立夏. 일곱 번째 절기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었다. 열세 번째 절기가 시작되고 나면 그는 다시 일곱 번째 절기만을 위해 나머지 날들을 보냈다. 그는 하필이면 여름 내였다. 그로 인해 그에게 계절이란 단 하나뿐이었다. 길고 지리하다던 여름의 길이가 유난히 유난스럽다.
“가지고 싶다 하면 주실 겁니까?”
“그럼.”
그는 마치 물건 하나를 언급하는 것처럼 무상하게 답했다. 솔직해지기로 했다. 거리낄 시간이 아까웠다. 잴 것도 없었다. 그는 가장 여름같은 사랑을 하는 중이었다. 세상에 신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는지, 잠든 그의 절반을 내려다보며 오래된 노트북을 두드려 보기도 했다. 물론 별 소득 없이 닫고야 말았지만, 대신 질문 몇 개를 얻었다.
당신은 신인가? 만약 그렇다면 신인 당신과 인간인 나의 가치는 동등할 수 있는가? 고민하다 보면 다시 처음으로, 나는 당신을 가질 수 있는가. 꼭 계절처럼, 절기처럼, 한 달의 첫날과 끝날처럼.
“여름이 점점 길어지고 있대.”
“저 10월에도 반 팔 옷 입고 다닙니다.”
변화에도 변할 수 없는 게 몇 개 있었다. 그 말에 속이 선뜻했다. 가을의 느낌은 덤덤한 척해봐도 결국 눈물로 끝을 맺고 만다. 그에게 여름이란 입추의 전까지였다. 더도 덜도 없었다.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오롯한 마음만을 나눴으면 좋겠다. 불순물은 체에 걸러 내다 버리면 없어지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늘 불안 섞인 사랑을 하면서 들키지 않으려 마음 졸이는 매일이란. 이미 서로의 불안을 이토록 잘 알고 있음에도.
내께 바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날이 되면 그의 가방은 불룩해졌다. 푸른 보에 싸인 복숭아 세 개가 이유였다. 매번 학교가 끝날 때까지 가방에 잘 넣어두던 것을 그날따라 사물함에 보관해 둔 탓이었다. 학교에 돌아가서 다시 들고 올 만한 시간이 없었다. 터덜터덜 길을 걷던 그가 조그만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날 냇가에 올라간 과일들 사이에서 둥근 우유빵 세 개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는 혼이 났지만 내는 온화했다. 어린 탓인지, 그는 내를 내로만 보지 못했다. 가을이 오자마자 언제 흘렀냐는 듯 멎고 마는 내가 사계절을 흐르길 바라게 되었고, 그가 따스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게 되었다.
내가 불러주는 이름은 따스했다.
아무렴, 여름이라니까.
성나게 퍼붓는 비가 요란했다. 장마는 끝나고 심해졌던 더위에, 온다 말이 없던 비였다. 한풀 꺾인 열기가 아쉬우면서도 여전히 장마 안에 머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대서大暑, 남은 날은 보름 이내. 화장실 안의 등이 깜박거린다 싶더니 결국 생을 달리했다. 여분 전등을 찾는다고 연 장롱에서 나프탈렌 냄새가 확 끼쳤다. 심장은 나프탈렌 냄새로도 쉽게 바닥까지 추락하곤 했다.
“자요.”
찰박찰박 물을 튀기며 걸어간 구멍가게는 하필 문을 닫았다. 다시 찰박찰박 걸어오는 길에 빵집을 들른다. 비가 거세져서 우산이 영 소용이 없다. 찰박거리던 발소리가 빨라졌다. 떠나면 어쩌지, 무섬증이라는 게 이 계절을 특정해 발병하는가. 가슴팍이 잔뜩 요동치는 그가 문 앞에서 딱 그를 마주쳤다. 그는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여름 빛깔로 판정내린 눈동자도 잔뜩 요동쳤다. 눅눅하게 내려앉은 문이 끼익끼익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어렵게 열리는 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수월하게 열린 문에서 물 먹은 기름 냄새가 났다. 덤처럼 따라오는 물 냄새는 전부 그의 흔적이었다. 어지러, 어지러. 빗물이 뚝뚝 흐르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빵만 먹으라는 거야? 우유빵 열두 개가 와르르 쏟아졌다. 사랑을 주워 담듯 조심조심 다시 품에 안았다. 하나는 높은 찬장 위에 숨겨 놓기로 했다. 올해의 기념 삼아 들고 갈 생각이었다. 들키지 말아야지, 네 어린 눈을 보면 마음이 아리니. 어린 게 무엇이든 간에. 그날 그 빵집의 두 번째 손님은, 모조리 빠진 우유빵 자리를 의아한 눈으로 훑을 수밖에 없었다.
“짜잔.”
“캠핑 온 것 같습니다!”
손전등을 매달았다. 처음엔 명주실로 매달았더니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기만 했다. 그의 집에 있던 녹은 테이프와 노끈 몇 개를 가지고 이리저리 애쓰자 며칠 정도는 꽤 괜찮은 등 역할을 해줄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희었던 화장실 안이 노랗게 변했다. 주황인가? 아무렇든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다. 같은 빛으로 물든 얼굴을 끌어와 입을 맞췄다. 놀란 듯하던 입술도 와르르 열렸다. 벌써 눈물이 날 것 같아 힘줘 감은 눈이 달착지근하다.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떼 내기로 한다. 이왕이면 자국이 끈적하니 남았으면 좋겠다. 그건 그를 그릴 수 있는 소중한 흔적이었다.
- 귀신도 있습니까?
-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지. 믿는 대로?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떠나지 마.
“거참, 전구 하나 사러 가는데 왁스를 왜 바릅니까?”
“토비오 쨩, 질투합니까?”
“선크림이나 바르셨으면 좋겠습니다.”
“앗, 토비오. 여기 안 발렸다.”
선크림 가득 묻힌 손으로 목덜미를 손으로 쓸자 그가 부르르 전율했다. 이미 발라져 있는 선크림 위에 선크림을 덧발라 목덜미가 반짝반짝했다. 얼굴이 붉어진 게 분명한데 그는 더 놀리지 않고 휭 나가버렸다. 상처받는 표정은 시간이 아무리 오래되든 들키기 싫은 것이었다. 면역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윽.”
“여름이라는 사람이 매미가 싫습니까?”
맴맴맴맴. 시끄러워. 땀이 올라 반들한 얼굴이 인상을 썼다. 조용히 시키겠답시고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그를 그가 저지했다. 왜? 눈으로 묻는 모양이 익숙하다. 한 철 사랑……하는 건데, 내버려 두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마음이 덜컥거렸다. 가게까지 가는 몇십 분이 짧다. 한 철, 한 철이 짧았다.
다시 이야기를 처음부터 되돌려서,
“처음 보는 꽃인데.”
“살살이꽃입니다.”
“어떻게 오이카와 씨가 처음 볼 수 있지.”
들어본 적도 없어. 진지하게 고민하면 그는 대답 없이 줄기를 꺾어 그의 귓가에 꽂아 둔다. 옅은 분홍이 가끔 날의 여름 하늘 같았다. 달랑거리는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더위는 금세 땀이 차게 하지만 놓지 않는다. 붕붕 흔들며 그와 걸음을 같이 했다. 가게에 도착하면 아쉬워 손을 한번 꾹 잡았다 놓았다.
“코스모스가 벌써 났네?”
“할아버지, 며칠 전에 문 안 여셨다던데요.”
“병원 갔었지, 그래.”
죽을 때가 다 됐는가…… 가게 주인은 설렁설렁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까끌까끌해진다. 여름밖엔 알 수 없지만, 아직 몇 개 여름은 정정하고도 남을 듯했다. 서글퍼진다. 그의 조부의 조부 때부터, 실은 설명하기 귀찮아 생략된 그의 또 조부의 조부 적부터 그는 이곳을 지켜 왔다. 신, 강, 가람, 내, 여름. 뭐라고 불리든 의미는 비슷비슷했지만 제일 좋은 건.
- 오이카와 상?
그가 처음 이름을 부르던 날이 서툴렀다. 그 날부터 네게 입 맞추고 싶었었다. 동그란 두상이 울적하게 사랑스럽다. 같이 가! 손이 연결돼있음에도, 아무렇든.
“살살이꽃이라며.”
“그게 그겁니다.”
코스모스나 살살이꽃이나 같아요. 어, 강 말고 가람처럼? 우연히 먹어본 자몽같이. 쓴데 달다. 또 뭐 피는데? 그는 이맘때쯤 늘 다른 계절을 묻곤 했다. 헤어짐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건 피부로 느껴졌다. 그는 이곳의 여름이었다. 가을에 핀다던 게 일찍 펴서 나랑 만났으니까, 나도 언젠가 너와 영원을 맹세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끔 신앙의 당사자가 되기도 했던 이의 말치고 책임은 없었다.
- 타오름달이라잖아요. 다른 이름이.
- …….
- 아직 빈말로라도 한여름이라고 말 못 하는데. 가을은 고사하고…….
그 생의 어떤 장마보다 그의 눈물이 더 많았다. 그는 말이 없었다. 정말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에게 여름이란 술술 꿰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 외의 계절엔 문외한이었다. 선선해지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선선함이란 무엇인가. 시림도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 솔직한 푸른 눈이 어지럽다. 세상 전부가 되고 말았다는 건 얼마나 위험하고 발칙한지.
시리다는 건 헤어질 때의 심장.
하지夏至는 낮이 가장 길다. 조그마한 철제 계단을 통통거리며 올라간다. 맥주를 한 캔씩을 땄다. 오래돼 김이 빠진 맥주가 걸렸다. 작년 건데요, 그는 말을 우물쭈물했다. 눅눅하고 미적지근하고 애매하게 따스하고 애매하게 차갑고…… 아 여름인가보다. 쑥색 모기향 하나를 태웠다. 불빛은 주황, 또는 빨강. 그는 그 빛깔이 그의 눈과 닮았다 얘기했다. 하늘에 노을이 지고 하늘과는 어울리지 않을 빛이 칠해지고 이내 밤이 오고 별이 쏟아질 때까지. 그의 입술에서는 소시지 맛이 났다가 초코 과자 맛이 났다가 맥주 맛이 났다가 했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면 혀가 차다. 그래 이건 차다는 뜻이야. 웃음과 함께 알게 된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선물은 너야?”
“아뇨 우유빵.”
허?! 기가 차 웃자 외려 놀란 티를 냈다. 우유빵보다 제가 더 좋으십니까? 할 말이 없어졌다. 당연히 토비오 쨩을 더 사랑하지. 우유빵은 좋아하고 너는 사랑하고, 당연한 거잖아! 붉어진 얼굴로 와르르 얘기하면 똑같이 붉어진 얼굴로. 당연한 거 좋네요.
그는 동지에 태어났다 했다. 눈이 가슴까지 쌓이던 날이라 했다. 그는 냉장고에 꽝꽝 얼려 둔 우유 한 팩을 칼로 서걱서걱 갈았다. 하도 힘을 준 통에 손가락까지 슬쩍 베고는, 밴드를 바른 손으로 갈린 우유를 담은 그릇을 건넸다. 이런 느낌입니다, 우유 맛은 안 나요. 아니 그럼 비가 얼어서 떨어지는데 우유 맛이 나겠어? 그에 그가 왁왁 소리를 쳤다. 그가 싱겁게 웃었다. 시린 것보다 더 차가운 날 말이구나. 세상의 가장 추운 부분에서.
생일 축하를 해 주고 싶었다. 그가 잠깐 나간 틈을 타 종이 한 장을 찢는다. 카게야마 토비오影山 飛雄. 생일 축하해.
……, ……그런데 생일날의 너는 차가워? 애같은 물음.
겨울, 겨울. 입에 달라붙지 않는 단어다. 그가 태어난 계절이랬으니 익숙해지고 싶다. 칠월의 끄트머리를 무시하듯 눈을 감고 달력을 넘겼다. 십이월. 흐린 눈으로 생일을 찾아 하트를 하나 그려 놓기.
[사랑만 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이잖아요.]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이 툭 떨어졌다. 티브이 불빛이 어른어른 아이의 얼굴을 비추고, 그는 아닌 척 눈물을 닦았다. 사랑만 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이란 늘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따라 주지 않았다. 사라질까 덜컥 난 겁에 서로의 어깨를,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왜 여름은 늘 축축해서는. 눈물도 그래서 나는 거다. 억지를 부리며 시간을 붙잡고 싶어서. 그가 남겨진 시간을 얼마나 큰 그리움에 젖어 보내는지 앎으로. 모르지만, 알았다.
“하고 싶은 거 말입니까?”
가을을 함께해요, 겨울을요, 봄을요. 왜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땐 봄에들 비유하는지. 난 늘 여름이어야 하는데.
“편지 써주세요.”
사 분의 일만을 너와 함께하니, 매일 세 편씩은 써야 네가 빠듯하게 매일을 내 마음과 함께할 수 있겠구나.
여름은 더워, 대도시보단 시원하다 해도 늘 에어컨을 틀어야 했다. 검은 봉다리를 흔들며 들어서는 그의 얼굴이 번들거렸다. 그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차가운 수건이 얼굴에 닿았다. 싱글 웃으며 냉동고에 둔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는 그를 보면 가슴팍은 늘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에어컨 온도를 낮추고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찬물을 몇 번 뒤집어쓰고 나오면 삑삑 소리가 난다. 잘 안 쓰는 찻잔을 꺼내 마른 잎 몇 개를 집어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이것 보세요.”
“차야?”
“오이카와 상 눈동자랑 같은 색.”
어떡하면 좋을지 모를 감정이 울렁거렸다. 차는 쌉싸름했다. 뭐, 좀 구수하기도 했고, 맛있다기보단 자꾸 생각이 나는 맛이었다. 마시고 있다는데 그의 잔 속 차가 줄어들질 않는다. 잠깐 일어선 틈을 타 입을 댔다. 먹먹한 가슴팍을 세게 내리쳐야만 했다. 예민한 미각 가득 짠내가 났다.
“여름 좋아해?”
“솔직하게 말입니까?”
“실은 나도 별로야.”
왜요? 눈동자는 반딱반딱. 처음 본 백열전구, 불꽃놀이, 얼음, 뭐든 처음 맞이하는 놀라운 것이라면 전부 닮아.
“더운 것도 싫고 벌레도 싫어. 사실 뭐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겠지만…… 아! 잠깐만 정정할래. 오이카와 씨 여름 좋아.”
그윽한 눈동자는 근사하다. 그의 눈동자는 매번 불타오르기 바빴다. 뜨거운데 겨울과도 잘 어울렸다. 짙은 속눈썹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그림자만큼 그의 심장을 떨어뜨리는 건 없었다. 언제든 어느 날을 뒤져 보아도.
“전부 싫은데…… 어떡해, 네가 있는데.”
“저…… 말입니까?”
“네가…… 다른 건 전부 상쇄시켜. 그러고도 모자라서 감정을 더하고 더하고 더해서…….”
나는 매번 여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사랑해.
그렇지? 네가 있는데.
울먹거리다 잠든 그의 머리를 한참 쓸어 주었다. 일주일? 손으로도 무리 없이 셀 수 있는 남은 날들이 있다. 함께할 수 있는 하나의 계절마저 이렇게 일찍 파해 지고야 만다. 팔월로 넘어간 달력을 보는 그는 아주 오랜 삶을 살아왔다. 모든 것들과의 이별에 익숙해져야 할 즈음은, 넘긴 지 오래다. 지금이란 당최 얼마나 짧은지 모른다. 정리하지 못한 그의 옷들을 마저 개어 장롱에 넣었다. 나프탈렌 냄새가 훅 끼쳤다. 초록색 망은 작년에 사 둔 것인데, 벌써 손톱만큼 작아졌다. 애정을 담은 눈이 오래오래 그것을 쓸어 보았다. 이제 매번 내를 찾아와 인사를 올리던 집안의 대가 끊길 것이다. 그가 그와 이렇게 사랑하는 이상은 그럴 것이다. 오래 내로서 살아왔으니, 앞으로의 긴 영원을 대가로 그와의 평생을 약속할 수만 있다면.
달력을 쓸던 손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사랑과 이별에 관한 슬픔은 연륜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이미 아니다. 이불을 걷어찬 그의 손가락 위로 하나하나 입을 맞춰 보았다. 짠맛이 난다. 낮에 경험한, 그의 것과 똑같은 짠맛. 우리는 이렇게 똑같이 짠데 왜.
“와.”
보글보글 욕조에서 거품이 피어올랐다. 노란색 헤어 밴드를 한 오이카와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입욕제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일찍 익은 무화과를 한입 가득 우물거리던 카게야마가 쑥스러움에 발그스름하다. 고개를 젖혀 카게야마의 어깨 위에 기댔다. 무화과와 재작년 매실주가 아닌 듯 잘 맞았다.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너무 그리워하지도 말고. 다시 보게 된다면 아 맞다, 참 당신이 있었지, 하는 눈으로 맞아 주길 바라고. 쪼글쪼글해진 손을 슬며시 잡았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긴장한 티가 역력하다.
그게 어떻게 맘처럼 됩니까. 개……새……. 뭐?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화들짝 소리를 지르며 추궁하는 터에 물이 여기저기로 철썩거렸다.
“아니라고 해! 잘못했다고 해!”
“……끼.”
“야.”
“사랑합니다.”
“……토비오.”
나도 너를 너무 사랑해. 다른 계절의 것까지 합쳐서 네 배쯤은 더.
“응, 토오루.”
충만한 감정을 담은 두 개의 뺨이 잘 익은 무화과 빛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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