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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여름은 불면같이

정오🌙 2018. 7. 20. 22:51

[오이카게] 여름은 불면같이


정오 글

 

 

오이카와 토오루 생일 축하해!


***


불면의 밤은 늘 느닷없이 그를 찾아오곤 했다. 생산적인 일을 하기엔 그저 머리를 비워두고 싶은, 한없이 미적지근한 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 한 구석에 담아두고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그러고 나면 겨우 잠든 밤 내내 그것은 그를 뒤흔들고 다음 날 하루까지도 머리에 가득 차오르는 것이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푸석하다. 눈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잠을 잔 건지 만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띵한 머리를 베개에 묻었다. 가슴 한 구석이 욱씬거리는 걸로 봐선 불면에 떠오른 사람이 오늘 하루를 지배할 예정인 듯했다. 괜한 눈물이 끈적하게 관자놀이를 적셨다. 아무 날도 아닌 보통의 하루에 기억이 스몄다. 비 아래 선명하던 눈동자가 밤처럼 떠올랐다.


여름은 불면같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그를 찾아오곤 했다.

그러면 불면은 늘 그때의 여름이 되어…….



“토비오쨩. 집에 안 가?”
“조금만 더 하다가요. 오이카와상 먼저 가셔도 됩니다.”
“……으응, 그래?”


찌르르, 웽, 찌르르. 작열하는 더위에 매미가 지칠 줄을 모르고 울고 있었다. 체육관 열쇠를 빙빙 돌리던 오이카와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너무 뜨거워진 날씨에 일찍 연습이 끝나 둘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체육관이 후텁지근하다. 열어둔 문 사이로 짜게 들어오는 바람도 뺨을 몇 번 쓸어갈 뿐 시원하지 않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땀을 닦았다. 스포츠 타월도 꿉꿉할 만큼 습기로 가득 찬 날씨였다.


“안 지쳐?”
“점프 서브가 안 돼서……. 오이카와상! 혹시,”
“싫—어.”


통 통 통 배구공이 바닥으로 굴러갔다. 반짝거리는 눈을 하고서 잘도 점프 서브 요령을 묻는 그의 말꼬리를 빠르게 잘라냈다. 그에 금세 불퉁해진 얼굴이 고개를 돌렸다. 무료하게 멀리를 응시하던 오이카와가 카게야마에게로 눈을 옮겼다. 점프 서브를 거절받고 나면 늘 툭 튀어나오는 아랫입술이 둥글다. 윗입술보다 조금 더 도톰한 아랫입술은 약간 삐툴었고, 덕택에 그는 늘 삐죽 올라간 입꼬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커다란 공 소리 뭐지? 서브 안 가르쳐준다고 시위하는 거야 토비오쨩?”
“아, 아닙니다!”


키득키득 웃으며 카게야마를 떠보자 그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유연하지도 않고 영 어리숙하기만 한 후배. 잔뜩 미워하기는 했으나 또 미워할 수가 없는 후배. 오이카와를 의식한 탓인지 공의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두어 개 날아오른다. 그가 중력을 거스를 때면 함께 나풀거리는 뒷머리가 깊은 바다의 빛깔이었다. 왠지 간지러워진 코를 긁적였다.

꽈르릉 쾅쾅.

오이카와가 인상을 찌푸렸다. 쨍쨍한 해 때문에 오늘은 안 내릴 줄 알았던 비가 결국엔 내리려는 것 같았다. 그것도 제대로. 우렁차던 매미 소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조그맣게 잦아들기 시작했다. 우중충한 해가 흐린 발자국을 남긴다. 문 쪽으로 걸어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난히 무거운 빗방울이 투둑 손을 적신다. 무거운 공기는 그를 곧장이라도 압사시킬 것 같다. 이내 설레는 흙내도 무엇도 없는 당연스런 여름 비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소나길까요?”
“장마.”
“태풍 온다고 안 했는데.”
“장마라니까. 바보 토비오쨩?”


카게야마가 어느새 옆에 다가와 걱정이 듬뿍 담긴 표정으로 그를 따라 오른손을 내밀었다. 가까이 온 그에게선 눅눅한 땀 내음이 나고 있었지만 그다지 싫지 않다. 뚝뚝 끊어지는 말에 ‘바보 토비오쨩.’ 종지부를 찍었다. “바보 아닙니다!” 발끈하는 카게야마의 이마가 둥글었다. 그는 온통 모서리로 이루어진 듯 뾰족하기 그지없으면서 또 잘 살펴보면 둥근 부분들이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계곡에 맨발로 들어갔다가 매끈하고 둥근 흰 조약돌을 주울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급작스레 어두워진 하늘에 체육관 앞의 가로등이 부스스 빛을 뿌린다.


“그칠까요?”
“장마라니까.”


지루하게 오겠지. 성글고 무겁게 땅을 때리는 비를 쳐다보며 오이카와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비가 시야를 가렸다. 분명 색이 넘치던 풍경이 비로 인해 온통 푸른빛을 띤다.


“이제 슬슬 집에 가야 하는데.”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처럼.


“우산 있어?”
“네. 오이카와상은요?”
“있지.”


감정이 끌고 온 괜한 충동이었다. 처음 쓰다듬어 본 후배의 머리는 부드럽고 축축했다. 땀이 손에 한가득 묻었지만 인상은 찌푸려지지 않았다. 손을 한 번 더 들어 올렸다. “하루살이가 붙었길래, 여기.” 바보 같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는 변명이었다.

두 번째로 쓰다듬어 본 후배의 머리도 여전히 부드럽고 축축했다.


“가방 챙기셨습니까?”
“토비오쨩이나 잘 챙기세요. 오이카와씨는 누구쨩과는 달리 완벽하기 그지없답니다?”
“……성격 진짜……”


최악. 툴툴거리는 카게야마를 보며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면전에서 욕을 얻어먹었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흐읍 숨을 들이쉬자 폐가 물로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이었다. 삐걱거리는 문을 닫고, 열쇠로 단단하게 잠근다. 그새 더 억세진 빗줄기가 걱정스럽다.


“토비오쨩 집이 분명 우리 집이랑 같은 방향이었지.”
“알려드린 적 없는데요……?”
“이래 봬도 주장이라고!”


아아. 싱겁게 응수한 카게야마가 비장한 표정으로 투명한 우산을 꺼내 들었다. 얇은 비닐 조각이 폭풍처럼 쏟아붓는 비를 막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도 그저 우산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가방 앞으로 매.”


쓸 데 없는 진지함이 감돈다. 펼친 우산을 든 채 허우적거리는 카게야마를 쳐다본 오이카와가 그를 다시 체육관 쪽으로 당겼다. “팔 벌려 봐.” 삐딱한 말투 치고는 섬세한 손길이었다. 뒤엉킨 가방끈을 바르게 펼쳐 단단히 앞으로 고정한다. 그 잠깐 동안 카게야마의 시선이 와 닿은 뒤통수가 따가웠다.


“가자.”


체육관에서 멀어져 교문을 넘었을 때 오이카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빤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운동화로 비가 스며들었고 우산은 이제 없느니만도 못한 존재가 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텁텁하기만 했던 바람이 그를 쓸어갈 것처럼 몰아친다. 몸을 추스르고 발을 옮기기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빗발은 끝을 모르고 거세졌고 점차 조밀해졌다. 여름이라고 악이라도 쓰듯, 와르르.


“토비오, 이리 와!”


소리를 쳤다. 그를 데리고 다시 체육관으로 향하려는데 손목이 잡혔다. 아직 덜 자란 손이 오이카와의 손목을 잡은 채 그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는 비로 가득한 오늘 같은 색이다. 눈을 깜빡였다. 비가 그의 눈동자의 빛깔인 것인지 그의 눈동자가 비의 빛깔인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네.”


다시 들어온 체육관은 여전히 덥고 꿉꿉했다. 귀청을 때리는 빗소리만을 제외하면 아까와 같았다. 어쩌면 조금 더 예민해진 감각까지도, 제외하고.


“가방 두고 가자. 신발도 벗고.”
“우산도 소용없는 것 같아요.”


아끼는 건데. 조그맣게 궁시렁거리는 후배는 덜 자란 티가 났다. 노란 우산 손잡이에 달린 바보쨩을 멍하니 응시하던 오이카와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카게야마가 습관처럼 만지작거린 탓인지 바보쨩의 눈은 흐릿해져 있었다. 답지 않게 오이카와의 눈치를 본다. 하긴, 조금만 더 걸으면 우산도 날려갈 듯한 날씨긴 했으니.


“우산 써도 젖을 것 같은데. 아예 쓰지 말까?”


그 말을 듣자마자 카게야마는 슬그머니 바보쨩이 달랑거리는 우산을 벽 한쪽에 밀어 두었다. 다시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입술을 꾹 깨물고서 안쪽에서 슬리퍼를 꺼냈다. 가끔 합숙 때 들고 다니던 거였는데 이럴 때 요긴하게 쓰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토비오쨩. 슬리퍼는?”
“집에 있는데…….”
“이용료는 우유 빵으로 받을게?”


예전에 쓰던 슬리퍼가 남아 있었다. 카게야마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렇게 하얀 피부색은 아닌데, 카게야마는 기분이 좋으면 색으로 티가 다 나는 편이었다. 오늘은 빨강. 붉게 물든 얼굴이 기뻤다. 이런 표정을 짓는 카게야마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애초에 얄미운 후배에 불과하다고 단정 짓고 그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탓일까, 오늘따라 신선한 모습의 그가 물밀듯 밀려들어왔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뺨이 간지러웠다. 낯선 느낌에 어깨를 으쓱하며 카게야마에게 슬리퍼를 내민다. 새로 사서 한 번도 신지 않은 것이었다.


“슬리퍼에서 좋은 냄새납니다.”
“오이카와씨 향이야.”
“알아요.”


고개를 푹 숙였다. 자꾸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겠다고 애를 썼다.


“운동해도 좋은 냄새만 나시니까…….”
“…….”


입술이 또 삐죽 튀어나왔다. 제 옷을 붙잡고 킁킁거리는 모습에 살며시 가슴을 쥐어 보았다. 지금 카게야마가 제 얼굴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이 잔뜩 일그러져 이상한 표정일 테니까. 풀리는 얼굴 근육과 웃지 않으려 끌어내리는 입꼬리가 묘한 부조화를 만들어냈다. 카게야마에게 다가가 똑같이 그의 옷에 코를 부벼 보았다. 비의 서걱한 향에 땀냄새가 섞여 나고 있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평소라면 문제 될 게 하나도 없었을 카게야마의 표정이 괜히 신경이 쓰인다. 마음에 들어 쭉 써왔던 코롱을 꺼내 들었다.


“입 열면 입에 들어간다.”
“압.”


지퍼라도 채운 듯 도장을 찍는 입술이 꼭 애 같았다. 앞에 한 번, 뒤쪽 목덜미에 한 번 코롱을 뿌렸다. 서늘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제게도 이런 향이 났던가 코를 찡긋했다. 같은 냄새를 달고 통통거리는 카게야마의 주위로 푸른 막이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여름의 치졸한 감정 덩어리. 그때의 오이카와는 정확한 그것의 이름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렇게 명명하기로 했다.


“가볼까?”
“늦기 전에요.”


머리부터 비가 적시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느낌이었다. 우산 안에 있을 적에는 두렵고 찝찝하기만 했던 것은 그저 떨어져 내리는 조그만 물방울들에 불과했다. 묘하지. 세상은 여전히 회백색이 섞인 파랑이었다. 밤하늘 빛깔로 물들어 하늘과 땅을 구분 지을 수 없게 만들었다. 꼭 같은 색의 카게야마 토비오마저도.


“손.”
“……?”
“……비 때문에 놓치면 어떡해.”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놓은 카게야마에, 왜인지 찔려 오는 가슴팍이 두려워 변명을 늘어놓았다. 맞잡은 손은 비 때문에 차가웠고, 제 손과의 마찰열 때문에 뜨거웠다. 의식하지 않으면 자꾸 눈이 그리로 흘렀다. 축 늘어진 머리가 비에 젖어 평소보다 더 짙은 색을 띤다. 오른쪽으로 걸어가 가로수 아래에 카게야마를 밀어 넣었다. 전보다는 좀 약해진 빗발이 그를 두드리고 지나갔다. 기분이 훨씬 더 나아졌다.


“나 미워?”
“……? 별로요.”
“오이카와씬 너 싫은데.”


……진짜 싫은데……. 말꼬리가 잦아들었다. 저벅저벅 아스팔트를 울리는 발에선 빗물 때문에 찍찍거리는 소리가 났다. 대답이 없어 바라본 카게야마는 멀뚱멀뚱 오이카와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엷은 빗줄기가 그런 카게야마의 형체를 따라 흰 띠를 그려낸다. 희고, 어둡고, 파란 것. 보석 같은 눈동자는 잘 익은 블루베리 같은 동공을 가지고 있었다. 비 오기 전 눅눅한 하늘이 그 주위를 맴돈다. 카게야마는 조금 상처받은 것 같아 보였다. 설사 아니라고 한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완벽히 허튼 말을 했다. 정말 그가 싫다기보단, ……. 인정하기 싫은 감정들이 가득하다. 재능이 부럽고, 또 두렵고, 다시 부럽고.


“……저는 오이카와상이 무서운 것 같아요.”


멈춰 섰던 발걸음을 옮기며 카게야마가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는 처음 들어보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오이카와상의 배구를 존경해요. 뛰어넘고 싶은데, 마주칠 때마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서워요.”
“그건 오히려…….”


그가 하고팠던 말이었다. 담담히 말을 꺼내는 카게야마의 손을 무심코 세게 쥐었다. 작은 손바닥과 작은 손가락. 배구공을 잡고, 배구를 사랑하는 곧은 손끝. 어디 있는지도 모를 해가 그의 윤곽선을 둥글게 비추고 있었다. 비에 프리즘마냥 반사돼 푸른빛을 뿌린다. 여름. 여름이었고, 여름 같았다. 여름밤이 아니라고 하기엔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그를 가득 채웠다.


“비밀 말해줄까.”
“뭘 말입니까?”
“오이카와씨, 토비오쨩 안 싫어해.”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지만 카게야마는 그거면 충분한 것 같았다. 분위기가 어색하다. 둘 중 누구도 다른 말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차 한 대 지나다니지 않는 아스팔트 위에서, 오이카와와 카게야마의 팔이 땅과 평행이 되어 흔들렸다. 풋내가 폐를 비집고 들어왔다. 멀리 서서 걷는 주제에 꼭 쥔 손이 단단했다. 긴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가로등이 깜박거린다. 주황색 빛이 카게야마 위로 떨어져 내렸다. 새벽같이 푸르고 건조한 음영 위로 여명같이 붉은 빛깔이 색을 드리웠다. 고즈넉하고, 여유롭고, 한가로운. 모든 것은 멈춰 있었고 그의 얼굴만이 걸음에 따라 빛에 비치는 부분이 달라지는 채로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오묘한 색을 내고, 하얀 면 반팔은 비에 젖어 살이 비쳤다. 찬 비와 섞여 조그만 수증기들이 퐁퐁 솟아난다. 이름 모를 날것의 감정이 갈비뼈를 차고 위로 다시 위로 기어올랐다.

아니, 정말 이름을 모르고 있었을까.


“진짜 안 그칠 것 같아요.”
“장마라니까, 글쎄.”
“장마라도 언젠간 그칠 것 아닙니까.”


비는 그치지 못했다.

그때의 기억이 불면같이 불쑥불쑥 이어질 거라고는.


그렇지? 어쨌건 그때의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렇게 답했다. 자주 보던 길은 처음 걷는 것처럼 낯설었고, 별 것 아니었던 가로등 불빛은 오늘따라 더 일렁였다. 빛 조각들은 와작 깨문 별사탕마냥 비를 타고 부서졌다. 산란의 주체는 카게야마였다. 그가 튕긴 빛들이 실루엣을 만들어 오이카와의 시각을 잠식시켰다. 매끈한 슬리퍼에 빗물이 들이차는 느낌은 새로웠다. 후배에게 빗물이 들이차는 느낌도 그와 비슷하게 새로웠다. 카게야마는 둥근 앞통수와 더 둥근 뒤통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늘진 뒷목과 가늘지만 짙은 눈썹. 길지 않으나 빽빽한 속눈썹과 그 위를 타고 흐르는 비. 둥글게 퍼져 나가는 가마는 하늘에서 바라본 색색의 우산 꼭지 같았다. 먹먹한 감정이 막막하다. 막막한 감정은 먹먹했다. 시작과 끝을 아우를 수 없는, 그가 세상을 바로 보고 있는 것인지 거꾸로 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조차 없는.


“아프세요?”
“아니?”
“얼굴이 꼭 아픈 것 같아서.”


입으로 내어 귀로 듣고 나면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차가운 비는 달아오른 얼굴을 타고 미지근하게 변했다. 평행선이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덜컥덜컥 오래된 전철처럼, 지루하기만 했던 순정 영화처럼. 둥근 눈동자가 위를 향하고 시선이 곧게 맞부닥친다. 온몸이 심장이 된 것 같았다. 지구를 가득 채운 심장 박동 소리는 모두 그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이마 해도 됩니까?”
“열?”


그래. 응수하자 카게야마가 오이카와에게로 양 손을 뻗었다. 빠듯한 사잇거리는 카게야마의 한 발자국에 싱겁게 사라졌다. 따사로운 온기를 가진 두 손바닥이 오이카와의 뺨에 닿아왔다. 주황빛이 쏟아졌다. 카게야마의 속눈썹 끄트머리와 콧대가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밤 색깔의 눈동자와 반씩 어울려 녹아내린다. 붉었다. 후텁지근한 가슴팍이 점차 벅차게 무거워지고 있었다. 오이카와의 허리가 숙여지고, 홍차색 머리가 갈라졌다. 아직 조그만 손이 살살 그의 머리칼을 비집었고, 풋내 나는 이마가 그의 이마와 살며시 마주쳤다. 약간 끈적거리고, 또 미끌미끌하고, 또 단단하고, 다시 차가운. 맹랑한 후배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속눈썹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 오이카와의 얼굴이 붉어졌다. 열 오른 이마 위로 빗물이 떨어진다. 카게야마가 턱 아래 손을 갖다 댔다.


뜨거웠다.

당신을 식히기엔 너무 부족했다.


“토비오쨩. 그…… 따뜻한 물로 씻고. 알지?”
“냄새, 다 사라진 것 같아요.”
“다시 뿌려주면 되지.”


인적 드문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나온 회색 담장은 카게야마네 집이었다. 식지 못한 열기를 털어내며 오이카와가 싱긋 웃음을 흘렸다. 반 박자 빠르게 뛰는 심장이 정신이 없다.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말들을 삼키고 다시 삼켜냈다. 속상한 뺨이 움찔거렸다. 코롱의 향이 사라졌다고 입술이 튀어나왔다. 올라간 눈꼬리엔 힘이 실리지 않았다. 뚫어져라 그와 눈을 마주 봤다. 달큰한 상승기류가 몸을 타고 흘렀다.

하얀 전조등 아래에서도 카게야마는 약간 주황빛이 돌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그의 머릴 쓰다듬고 눌어붙은 발을 억지로 떼어냈다. 다 젖은 그가 향하는 길은 카게야마의 집과는 정 반대인 방향이었다.


뉴스를 봤다. 장마인 줄 알았던 것은 태풍이라고 했다. 울음이 웃음에 맴돌았다. 좀처럼 현실 감각이 없는 얼굴이 멍하다. 태풍의 눈 아래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감기를 오래 앓아야만 했다.


가벼운 두근거림인 줄 알았던 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그것도 첫,


첫 사랑.



꿈만 같았다. 기억은 변색되고 변주되기를 반복하며, 잊히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끝없이 머리로 복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턴 뇌리에 박힐 듯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된다. 매미가 울기 시작하면 그가 떠올랐다. 요즘은 살펴보기 힘든 어둑한 주황색 가로등도. 기상캐스터가 장마를 언급하기 시작하면 태풍이 떠올랐고 태풍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장마가 떠올랐다. 아쉬움에 몸을 떠는 건, 이토록 기억에 남고야 마는 건 어린 마음이 이뤄지지 못함이어서일까. 가까스로 고갤 내밀었던 씨앗은 너무 많이 내린 비에 잠겨 익사하고 말았다.

여름은 어지럽다. 덜 마른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루 종일 피곤했는데 정작 침대에 누우니 잠은 달아나고 없다. 여름이라는 것이다. 불면은 이렇게 뜬금없이 그를 찾아와 진득한 홍차색 눈동자를, 다자색 동공을 던져두고 갈 것이다. 가슴이 쓰렸다. 손바닥으로 꾹 눌러본다. 비 아래 선명하던 눈동자가 해처럼 떠올랐다.


여름은 불면같이, 그도 모르는 사이에 불쑥 그를 찾아오곤 했다.

그러면 불면은 늘 그때의 여름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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