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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게] 봄엔 잠을 잤다

정오🌙 2018. 11. 30. 00:28


[오이카게] 봄엔 잠을 잤다




정오 글




***




가능하시다면 아래 음악을 bgm으로 깔고 봐 주세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 그 여름으로






***






그냥……, 당신과 나는 너무너무 달랐습니다. 내가 좋아하던 돼지고기 카레를 당신은 한 번도 좋아한 적 없었고, 내가 좋아하던 추운 겨울날도 당신은 전혀 좋아하지 않았었죠. 우린 연애했지만 난 늘 당신에게 목말라 있었습니다. 용기내 꺼낸 사랑한단 말에 당신은 고갤 끄덕이는 게 다였고 쉽게 내게 큰 소릴 내곤 했었었죠. 도저히 못 참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지긋지긋한 마음에 울며 걸어 나가도 붙잡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나면 다음날 꼭 전화가 왔었습니다. 받으면 집 앞으로 오라는 일방적인 당신의 말. 웃기지 않습니까, 병신 같았죠? 난 내 마음에 못을 박아대며 결국 당신에게로 움직였었잖아. 그럼 당신은 날 꼭 끌고 들어가 구석진 골목에서 키스부터 하곤 했었죠.


슬펐습니다. 당신은 날 너무 잘 알고 있었거든요.






내 생일이 되면 당신은 선물을 사 갖고 왔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당신에게서 세 번의 생일 선물을 받았었는데. 있죠 오이카와 상. 저 코트 잘 안 입습니다. 단색 상의도 별로 안 좋아하고 하루 종일 튀김만 먹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알고 있었습니까. 몰랐겠죠. 난 당신에게 수백 번 얘기했는데 당신은 단 한 번도 기억해준 적 없었으니까. 아세요? 내가 정말 당신에게 받고 싶었던 건 사랑한다는 말과, 날 조금만 더 배려해줬음 하는 행동과, 나에 대한 관심이었어요. 가판대에 파는 흔해 빠진 작은 꽃송이였고, 당신이 썼을 것이 분명한 모난 편지였죠. 지금은, 혹시, 아십니까?


슬펐습니다. 당신은 남보다도 더 날 몰랐거든요.






참, 오이카와 상 이건 아십니까. 제 생일이 12월 22일이라는 거. 몰랐겠죠. 늘 제게 말을 해줬어야 알지 않냐며 되려 화를 냈었잖습니까. 저는 지금 이곳에서 당신 생각을 하며 당신을 그리고 있는 게 씁쓸해 미칠 것 같아요. 그건 아십니까. 저 당신 때문에 매일 울고 있었습니다. 연애하기 전, 당신을 바라보던 그때보다 연애하는 도중이 더 힘들었습니다. 당신 휴대폰엔 여전히 다른 이의 번호가 가득했고 가끔 목이나 가슴에 입술자국을 남긴 채 내게 안겨 왔었죠. 역시 토비오 쨩이 제일이네, 쇠꼬챙이로 내 맘을 지지는 듯한 말을 하면서요.






당신이 안 들어오는 날이면 매일 밤의 패턴은 똑같았었죠. 클럽에 들어가 끈적한 춤을 추고 있는 당신을 데려오거나 바에 들어가 다른 사람과 혀를 나누고 있는 당신을 끌고 오거나. 처음엔 내가 그래도 당신의 연인인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화도 내 봤지만 끝에 가선 우습게도 익숙해지더라고요.

당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하며 고갤 끄덕이게 되더라고요. 왜인지 아십니까. 한 사람과만 만나면 질리지 않겠냐고, 이게 다아 널 오래 질리지 않고 만나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당신이 그랬으니까. 그건 아십니까. 제가 여기저기 알아보고 검색하고 물어도 봤는데, 어떤 연인도 만나기로 약속한 지 오일 만에 클럽에 나다니지는 않아요. 오이카와 상.






난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아서 당신과 헤어졌습니다. 당신은 뭐라고 했었죠, 근데. 그럼 토요일 밤마다 토비오 쨩이랑 더 이상 관계 못 맺는 거냐고 그랬죠. 그때 난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어쩌면 알면서도 부정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심코 나온 쨩이라는 말에 가슴이 터질 만큼 아팠는데도 익숙하게 넘기게 됐던 건, 역시 알고 있었던 거겠죠. 그때까지의 저도.

나중에 보니 당신은 주변의 모든 이들의 생일을 챙겼더라고요. 나와 똑같이 신발을 사 주고 귀걸이를 사 주고 립스틱을 사 줬더라고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도 당신과 헤어진 지 채 3일도 지나지 않아, 그런 당신인데도…… 너무 그리웠습니다. 당신의 집을 찾아갔었어요. 1234. 뻔한 비밀번호조차 안 맞는 게 우스워 눈물을 흘렸어요. 0720. 당신 생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라고요. 당신과 헐벗은 남자가 나타나더라고요. 저는 당신이 바이임을 처음 알았습니다. 아니, 당신의 입장에선 바이가 아니었습니까. 그냥 남자와도 관계 맺을 수 있는 거였습니까.


언젠 내게 내가 가장 특별하다고 해놓고선.


끝내 아픈 사람.






그가 당신에게 활짝 웃었습니다. 비밀번호를 바꿨느냐고. 당신은 여전히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아 이 말은 도무지 잊질 못했어요. 당신의 목소리가, 정말 너무 오랜만에 듣는 당신의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웠어요.

0512. 네 생일로 바꿔놨지.

몰래 엿듣던 난 결국 주저앉아 통곡했었어요. 당신도 날 봤겠죠. 어, 누구야? 하고 묻던 그에게 취객 아니겠냐며 들어가자고 했으니.

나와 눈까지 마주쳐 놓곤.





……여하튼. 당신을 이젠 놓으려 합니다. 괜한 생각이었습니다. 오이카와 상. 괜히 마음이 찢어지게 아파오는 걸 보니 내가 그다지도 미운 당신을 너무나 사랑했었나 봐요. 곧 버스가 올 겁니다. 난 버스를 타고 당신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갈 거예요. 여전히 당신을 그리고, 아파하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눈을 감는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휴대폰은 오후 두 시 반을 알렸다. 삼십 분은 지나야 버스가 올 거다. 자박자박. 흙먼지가 이는 이곳을 지나던 누군가 내 앞에서 멈추는 느낌이다. 이 버스를 타려나. 난 손을 들고 눈을 가렸다. 병신. 익숙한 향이 날 건 또 뭐람. 당신이 갑자기 생각날 건 또 뭐람. 내 후드 팔이 눈물로 젖을 때쯤, 눈앞에서 털썩. 소리가 났다. 쓰러진 건가 싶어 고개를 쳐든 난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술을 세게 깨물고 말았다. 버석해진 입술이 잇자국대로 터져 버린다.






“미안해.”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토비오 쨩…….”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토비오.”

“왜 이러십니까. 사람 잘못 보신 것 같다니까요!”

“카게야마 토비오! 너 맞잖아. 너…… 너…….”






왜 우십니까. 오이카와 상. 당신이 왜 울어, 응?

난 고갤 돌렸다.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허상이다. 봄날의 아지랑이가 만든, 지독하게 눈물겨운 허상. 털털털. 곧 고장 날 것 같은 차가 당신의 등 뒤로 뿌연 흙먼지를 남기며 지나갔다.

지나가는 김에 나 좀 꿈에서 깨게 해 주고 사라지지.






“미안해. 토비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제발, 제발! 사람 잘못 봤습니다!”

”미안했어. 지금도 너무 미안해. 이런 말 너무 미안한데…… 근데 너무 사랑해…….”






사랑한다고. 당신이, 날? 머리 위에 있던 벚나무가 바람에 꽃잎을 떨궈낸다. 비가 내렸다. 동화 같은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당신의 꿇은 두 무릎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오이카와 상입니까?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게, 자존심이 그 뭣보다 중요했던 당신이 정말 맞습니까? 입술을 또 물다 피가 나길래 혀로 핥았다. 따갑다. 흙먼지가 묻었는지 흙 맛이 났다. 꿈은 또 아닌 것 같았다. 건조한 뺨을 타고 미적지근한 눈물이 흐른다. 꼭꼭 담아놨던 게 병신같이도 터져 버린다. 다 식었습니다. 오이카와 상. 다 식었어. 당신을 그리며 흐르지도 못한 액체가, 다 식었어요.






“……봄엔 잠을 잤다.

내 앞에 있는 건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었어. 봄에 깨려 한 적이 없어서 네가 봄인 줄 몰랐어.

……토비오 쨩. 네가 없는 난 봄이 오지 않는 겨울이야. 네 봄엔 늘 잠들어 있느라 몰랐어. 내게 네가 맘 놓고 눈 감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존재였단 걸, 나 하나도…… 하나도 몰랐어.”

”…….”

“……네가 봄이란 것, 내가, 있잖아. 내가…… 진짜 미련하고 멍청하고 못되게도, ……몰랐어…….”





토비오 쨩. 날 좀 봐주면 안 될까. 매일 네게 손으로 편지를 쓸게. 너의 봄에서 흩날릴 꽃잎을 모아 책 사이 소중하게 끼워 놓을 거야. 남들 의식하지 않고 따듯한 봄날 입 맞출 거고, 너와 손 잡고 걸을 거야.

그러고 싶어.






용서를 구하는 당신의 뒤로 덜컹거리며 초록색 버스가 다가온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걸 바라보던 당신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한 걸음. 당신이 내게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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